“월풀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나올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산 냉장고 덤핑 혐의 재심의 결정이 내려진 것에 대한 정부 관계자 말이다. 정부뿐만 아니라 산업계도 지난 2012년 국제무역위원회(ITC)의 기각 결정을 `최종`으로 봐 왔다. 당시 최종회의 참가자 5명 전원이 `부정적 의견`을 냈던 만큼 사안이 끝난 것으로 확신했다. 그럼에도 월풀은 이 문제를 국제무역법원(CIT)까지 끌고 가며 기각 결정 번복에 힘을 쏟아온 것이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초 미국 ITC의 한국산 세탁기에 대한 상계관세·반덤핑관세 부과가 정당하다는 결정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분석이다.
◇“한국 견제 의미 크다”
월풀의 이번 조치는 북미 시장에서 한국 산업계에 대한 경계 의미가 크다. 삼성전자·LG전자 양사가 북미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나타내는 가운데 최근에는 프리미엄 시장과 B2B(기업)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위기의식을 느낀 것으로 해석된다. 시장조사결과를 보면 2012년 기준 미국 프렌치도어 냉장고 시장점유율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각각 23.7%와 17.9%로 미국 기업을 앞선다.
국내업계는 ITC가 재심의를 하더라도 기존 결정이 번복될 가능성은 낮다는 주장이다. LG전자 관계자는 “월풀의 후속 법적 조치로 판정을 번복할 만한 내용은 아닌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월풀이 강력하게 재심의를 요구하고 나선 데에는 한국 기업이 미국 산업에 피해를 주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지난해부터 미국 산업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애국심 마케팅`도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 가전업체 고위 임원은 “한국 기업이 미국 시장에서 잘하고 있다”며 “미국 본사에서는 한국 기업의 북미 시장 점유율 확대에 고민이 많은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몽렬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국제통상팀장은 “냉장고와 달리 세탁기에서 반덤핑·상계관세 결정이 그대로 통과되자 한국 기업에 간접적으로 타격을 주기 위한 전략 일환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감을 전했다.
◇미국 보호무역주의 확산 신호탄(?)
한국산 세탁기 반덤핑 관세 부과조치를 놓고 한미 양국이 대립하는 가운데 꺼진 듯했던 한국산 냉장고 덤핑 논란의 불씨가 되살아나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연초부터 주요 수출 상대국에 대한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 신호가 잇따르면서 우리 주력 수출산업 보호에 비상등이 켜진 셈이다. 정부는 미국 CIT 판결에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피하면서도 예의 주시하는 분위기다.
앞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절차에 돌입한 세탁기 반덤핑 조치와 달리 미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아닌 법원 차원의 재심의 지시기 때문이다. 상대국 법원 결정에 정부가 직접 대응하기는 조심스럽다는 시각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미 법원과 해당 기업 간의 사안으로 정부가 개입할 사안은 아니다”면서 “다만 향후 ITC 재심의 과정 등을 주시할 것”이라고 전했다.
만약 ITC가 기존 결정을 번복하면 우리 정부의 셈법은 복잡해진다. 우선 지난 세탁기 반덤핑 조치처럼 불합리한 판정 요소가 있다면 정부 차원의 공식 대응이 불가피하다.
단순히 개별 건에의 대응뿐 아니라 가전 분야를 중심으로 계속되는 해외 주요 국가의 보호무역주의 공세를 차단할 방법도 찾아야 한다. 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우리 수출품에 적용 중인 해외 국가의 수입규제는 20개국, 총 107건에 이른다.
업계 전문가는 “국익을 추구하면서도 상대 국가 및
기업과 마찰을 최소화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는 것이 관건”이라며 “정부가 상황을 주시하면서 국내 업계와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열어놓고 폭넓게 협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표】한국 대상 연도별 신규 수입규제 피소건수 추이
※자료:한국무역협회
김준배·이호준기자 jo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