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재부품산업은 지난해 수출 2600억달러, 무역흑자 1000억달러로 급성장하면서 새로운 수출 주역으로 성장했다. 소재부품은 민간 투자와 정부 육성의지가 결합해 경쟁력을 키워왔다. 특히 IT산업의 성장패턴은 한국 제조업 성장모델의 전형을 보여준다.
전방산업(대기업·완제품)과 후방산업(중소기업·소재부품)은 서로의 경쟁력을 높이는 일등공신이었다. LCD 발전은 디지털TV 시장에서 소니 추월을 뒷받침했고, 메모리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의 기술 축적은 스마트폰 세계 재패를 앞당겼다. 시장 침체기에도 메모리, LCD, 모바일 D램, 카메라모듈 등은 안정적 수요처를 믿고 기술 개발을 가속화할 수 있었다.
반면 소니는 LCD를 자체 생산하지 못해 TV를 제대로 팔기 어려웠다. 샤프는 액정 기술력은 좋았으나 팔 곳을 찾지 못했다. 일본 D램 업체들도 세트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시장에서 퇴장했다.
엔화 약세가 다시 관심이다. 소재부품이 강한 일본이 엔저 날개를 달았다. 일본과 경쟁이 치열한 분야에서는 힘든 싸움이 불가피하다. 중국도 소재부품에서 한국의 성장전략을 복제하고 있다. 낮은 비용을 무기로 기술력에서도 한국과 격차를 줄이는 중이다.
수요산업과 소재부품 간의 관계를 새삼 돌아보게 하는 일례가 있다. 일본 출장에서 A사 현지 지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일본 J사는 특정 핵심 소재에서 절대강자다. 그런데 국내 B사가 국산화에 성공했다. A사로서는 당연히 B사로 물량 일부를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J사가 감정적으로 아예 공급을 끊어버리면 A사의 생산은 어려움에 처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결국 A사는 B사의 시제품을 받아보는 데 그쳤다.
이 사례는 두 가지 시사점을 준다. 먼저 핵심 소재는 그 자체로 중요한 부가가치 원천이자 중소기업의 독립적 성장을 담보해주는 영역이다. 세계 실리콘웨이퍼의 70%를 차지하고, 한국의 핵심 LCD소재와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일본 기업은 수익성과 성장성에서 부러운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는 핵심 기술을 발판삼아 새로운 분야로 시장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다. 원천 기술에 기반한 핵심 소재부품일수록 융합 패러다임에서 시장 창출 기회가 크다. J사는 원천 기술을 타 분야로 발전시키는 성장동력 다각화 전략으로 성장을 이어갔다.
무역 2조달러와 산업 고도화를 앞당기려면 IT산업의 전후방 시너지 모델을 전 산업으로 확산시키는 발전전략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완제품이 주도하고 소재부품이 부수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이었다면 앞으로는 소재부품의 첨단성과 융합성이 완제품 경쟁력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소재부품의 역할이 확대되면 완제품과 서로 경쟁력을 끌어올려주는 보완적 시너지가 배가될 수 있다.
산업을 넘어 생활·사회 전반에서의 융합·스마트화는 중소기업이 우리 산업을 이끌 시대가 왔음을 예고하는 이정표이자 소재부품 시장의 대세다. 시대의 변화는 혼자라도 잘 만들면 팔린다는 각자도생보다는 상류와 하류 기업들이 창의적으로 협업하는 제휴가 더 주효할 것임을 의미한다. 제품 연결고리 중심에 융합 소재부품이 많아질수록 우리 산업의 동맥은 더욱 튼튼해진다.
갑오년 말의 해가 밝았다. 독창성과 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들이 새로운 `머니볼(투자대비 큰 효과 기대)`로 주목받고 발굴된다면 우리 제조업의 미래는 한층 빛날 것이다. 산업 정책에도 전후방산업을 톱니바퀴처럼 교합시키는 시스템적 철학이 스며들 필요가 있다.
소재부품산업은 그동안 벌판을 뛰놀 정도로 다리 근육을 잘 단련시켰다. 기업들이 울타리를 벗어나 넓은 세계로 거침없이 달릴 수 있도록 힘껏 밀어주는 환경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서동혁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연구실장 donhy@kiet.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