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을 외면할 기업은 한 곳도 없었다. IMT2000 선정정책이 확정되자 통신 업계는 최상의 컨소시엄을 구성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변수가 등장했다.
2000년 7월 14일. 정보통신부가 IMT2000 선정정책을 발표한 지 이틀 후인 이날 사업자 심사기준 개선안을 발표했다. 다소 의외였다. 핵심은 사업 희망자가 컨소시엄을 구성하지 않을 경우 0점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IMT2000사업자 심사에서 컨소시엄 구성이 당락(當落)의 열쇠로 등장한 셈이다.
개선안을 발표한 석호익 정통부 정보통신지원국장(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KT 부회장 역임, 현 통일IT포럼 회장)은 기자들의 질문에 “현행 심사항목은 다소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부분이 많다는 주장이 나와 심사 항목을 구체화하고 계량화 비중을 높였다”고 밝혔다.
석호익 국장의 말.
“당시 사업 희망자의 대주주는 기존 대기업들이었습니다. 자칫 특혜 시비에 휘말릴 수 있었어요. 중복 과잉투자를 막고 중소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컨소시엄 구성 비중을 높이도록 했고 이를 심사에 점수로 반영하겠다고 밝힌 것입니다.”
개선안은 사업자 선정 심사 때 컨소시엄 구성 점수를 당초 5점에서 8점으로 상향조정했다. 주주 구성 안정성과 주식 소유 분산 정도에 각각 4점씩 배점하고 컨소시엄을 구성하지 않으면 0점 처리키로 했다.
주주 구성 안정성은 신청자가 투자, 증자, 임원인사 등 의사결정을 신속하고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지를, 주식 소유 분산 정도는 기간통신사업자, 정보통신 중소기업, 통신장비제조업체, 콘텐츠업체 등에 주식을 적절히 분산했는지를 중점 평가하기로 했다.
사업계획서 심사는 비계량평가 83점, 계량평가 17점으로 하며, 일시출연금 액수에 따라 최고 2점을 배정해 102점을 만점으로 했다.
심사항목은 서비스 제공의 타당성과 설비 규모 적정성(35점), 재정능력(30점), 기술개발 실적, 계획(35점)으로 단순화했다. 총점수가 70점 미만이거나 심사 항목별 점수가 60점 미만일 때는 과락(科落)으로 탈락시키기로 했다.
정치권도 IMT2000 사업자 선정에 관심을 보였다. 그해 7월 20일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서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한나라당 사무총장 역임, 현 코리아비전포럼 대표)이 “상임위 정식안건으로 여야 간사 간 협의를 거쳐 국회에 IMT2000 소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김형오 의원(국회의장 역임)을 위원장으로 하는 IMT2000 실무대책위원회를 구성, 운영했다. 정통부는 개선안에 각계 의견을 수렴해 그해 7월 20일 정보통신정책심의위와 7월 21일 규제개혁위 심사를 거쳤다.
그해 7월 29일. 정통부는 이날 `기간통신사업자 허가신청 요령과 심사기준` 개정안을 확정했다. 이 안은 정통부 제2000-63호로 고시했다. 시행은 8월 1일부터였다.
개정안은 IMT2000사업자 선정정책 목표를 소비자 후생 증대, 통신서비스 경쟁력 강화, 중복·과잉투자 방지, 고용 창출 등에 두었다. 그동안 3단계로 구분했던 심사항목은 2단계로 간소화했고 심사기준도 객관화했다. 주관성 항목은 줄이고 대신 계량평가 점수를 5점에서 17점으로 상향 조정했다. 사업계획서는 본문과 부속서류를 통합해 작성토록 했다.
정통부가 IMT2000 심사기준을 확정하면서 가장 고심한 게 공정성이었다. 정통부는 1996년 PCS사업자 선정과정에서 특혜 비리의혹이 제기돼 줄초상을 치른 아픈 경험이 있었다. 정통부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최대한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는 과정을 거쳤다. 두 차례의 공청회, 세 차례의 정보통신정책심의위를 열었고 소위원회 구성과 인터넷 공청회를 거쳐 심사기준을 확정했다. 청와대나 여당에서도 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청탁이나 압력이 없었다. PCS 학습효과였다.
그해 8월 10일. 정통부는 IMT2000 핵심 부품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2002년까지 1440억원을 투입해 부품 국산화율 60%를 달성한다는 게 골자였다.
◇모뎀 개발=비동기 방식 모뎀을 중심으로 2000년 7월까지 196억원(정부출연 120억원)을 투입하고 2001년에 140억원(정부출연 70억원)을 추가 투입, 개발을 완료한다.
◇부품 개발=MPEG4, 코덱, 주문형반도체(ASIC) 등 10개 부품 과제에 지금까지 145억원(정부출연 78억원)을 투입했다. 차세대기술개발협의회에서 발굴한 `산업기술 개발사업` 과제에 2000년 하반기 100억원(정부출연 50억원)에 이어 2001년에는 246억원(정부출연 123억원)을, 2002년에는 454억원(정부출연 227억원)을 투입한다. 부품업체와 시스템업체와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관련 업체 간 컨소시엄을 우대한다.
◇차세대 핵심 기술 개발=현재 세계적으로 추진되는 4세대 이동통신 시스템의 표준화와 기반 기술을 중심으로 2001년까지 159억원(정부출연 106억원)을 투입하고 차세대기술개발협의회에서 지정 공모사업으로 추진한다. 국제 경쟁력이 강한 2세대 이동통신단말기는 부품 국산화율을 2000년 기준 63%에서 개발을 마치는 2001년 말에는 전용부품 100% 국산화를 이루고 IMT2000 단말기 부품 국산화율도 2002년 60%를 달성해 무역수지를 개선한다.
그해 8월 22일. IMT2000 사업권에 도전했던 한국IMT2000컨소시엄(추진위원장 김성현 넥스텔 사장)이 이날 오후 추진위원회를 열어 9월 30일을 기해 컨소시엄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김성현 위원장은 해체 배경에 대해 “IMT2000 사업권 경쟁이 한국통신, SK텔레콤, LG 3자 구도로 굳어지면서 이들 3개 컨소시엄의 회원사 빼내기가 계속돼 어려움이 많았다”면서 “과당 경쟁에 따른 심각한 국력 낭비가 우려돼 발전적 해체의 결단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지난 1999년 10월 하나로통신과 온세통신 등 571개 회원사들과 3만6000여가구의 국민주로 설립한 한국IMT2000컨소시엄은 1년여 만에 사업권 도전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순항할 것으로 예상했던 IMT2000 사업자 선정 행로(行路)에 기술표준이란 복병(伏兵)이 등장했다. 통신사업자들은 유럽형 비동기식을 주장했고 장비업체들은 미국형 동기식을 요구하면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그해 9월 6일. 황중연 정통부 전파방송관리국장(우정사업본부장, 한국정보보호진흥원장 역임, 현 개인정보보호협회 부회장)은 “주파수 할당은 정부의 복수표준 선택 원칙에 따라 `동기` 혹은 `비동기`로 규정될 예정이며 특정 방식으로 표준을 절대 강제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해 9월 15일. 정통부는 이날 오전 열린 정보통신정책심의위원회(위원장 곽수일 서울대 교수) 심의를 거쳐 IMT2000 사업 허가신청 접수기간을 당초 9월 25일부터 9월 30일에서 10월 25일부터 10월 31일로 한 달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안병엽 정통부 장관(17대 국회의원, ICU 총장 역임, 현 KAIST 초빙교수)은 이에 앞서 14일 오후 4시 정통부에서 3개 통신사업자 및 3개 통신장비업체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어 이같이 결정했다.
정통부는 회의에서 곽수일 정보통신정책심의위원장(현 서울대 명예교수)을 회장으로 하는 실무협의회를 구성, IMT2000 표준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한 뒤 이를 기초로 표준문제를 매듭짓기로 했다. 안 장관은 이날 “서비스업체와 장비업체가 머리를 맞대고 기업 이익보다는 국가 이익에 초점을 맞춰 (표준문제를) 논의해 달라”며 “백지상태에서 업계와 국가 이익차원에서 논의를 해 어떤 형태든 건의를 하면 정부는 가감 없이 이를 수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허가신청 기간을 연기한 것은 서비스업체와 장비업체 간 기술표준 이견을 조정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안병엽 장관의 증언.
“정부는 처음 동기식과 비동기식을 5대5로 생각했어요. 동기식이 비동기식에 비해 열세이나 그렇다고 이를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SK텔레콤은 처음에 동기식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SK텔레콤이 비동기식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모두 비동기식을 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정책이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어요.”
석호익 국장의 설명.
“SK텔레콤은 공개적으로 동기식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안 장관에게도 그런 입장을 밝혔어요. 그런데 나중에 비동기식으로 입장을 번복했습니다. 이로 인해 업체 간 이견을 조율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정통부는 사업허가 신청기한을 한 달 늦추더라도 연말까지 사업자를 선정한다는 일정에는 변화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정통부는 그해 9월 21일 IMT2000 기술표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통신사업자와 제조업체 실무책임자 등 정보통신 관련 전문가로 `IMT2000 기술표준협의회`를 구성했다. 협의회 위원장은 곽수일 서울대 교수(현 명예교수)가 맡았다. 위원은 통신사업자, 장비업체, 연구기관, 동기식과 비동기식 선호업체 대표 등으로 구성했다.
△통신사업자 위원=남중수 한국통신 상무(KT 사장 역임, 현 대림대 총장), 이정식 LG텔레콤 상무(현 LG유플러스 HS사업본부장), 조민래 SK텔레콤 상무(현 코원에너지서비스 대표)
△제조업체 위원=김운섭 삼성전자 전무(삼성전자 부사장 역임), 신인철 현대전자 전무, 연철흠 LG전자 상무, 유길수 텔슨전자 부사장, 이재호 성미전자 연구소장
△민간전문가=윤창번 KISDI 원장(하나로통신 회장 역임. 현 청와대 미래전략수석), 정선종 ETRI 원장(현 통신위성우주사업연구회 고문), 강응선 매일경제 논설위원(현 한경대 석좌교수), 최경환 한국경제 논설위원(지경부 장관 역임, 현 새누리당 원내대표), 김왕기 중앙일보 논설위원(전 KB금융 부사장) 등이었다.
안병엽 장관은 그해 9월 25일 “IMT2000 기술표준 문제는 협의회 의견을 가감 없이 수용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기술표준협의회가 어떤 해법을 제시할지가 관심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