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디자인산업은 최근 10년 새 천국과 지옥을 연이어 경험했다. 1997년 영국 노동당의 집권 이후 토니 블레어 내각은 경제발전과 국가브랜드를 새롭게 전환하기 위해 창조산업 육성에 나섰다. 당시 디자인은 고부가가치산업으로서 인식되는 것은 물론 산업간 융합을 이끌 창조산업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정부의 전폭적 지원이 이뤄졌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 유럽을 강타한 경제위기에 영국 디자인산업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정부의 재정지원이 줄어들면서 세계적 디자인전문교육기관인 영국왕립예술학교(RCA)의 학비는 3배나 치솟았다. 영국 디자인회사 포피플(ForPeople)에서 일하는 이주희 이사는 “경제호황기에는 간판만 걸면 일감이 알아서 찾아왔지만 불황이 덮치면서 영국 디자인업계에도 옥석이 가려졌다”고 기억했다.
영국 내 많은 디자인회사들이 사라졌지만, 혁신은 위기를 디딤돌로 삼았다. 디자인을 비롯한 창조산업을 향한 투자는 방송, 콘텐츠를 넘어 서비스, 제조업과 접목되며 글로벌 기업의 씨앗이 됐다. 영국은 항공·전자 등 하이테크산업에 디자인을 접목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했고, RCA 출신 디자인 영재들은 혁신 기업 창업에 나섰다. 디자인 경영은 제품에만 머물지 않고 서비스, 에너지, 환경까지 경계를 넘나들며 확장됐다.
크리스틴 루스캣 영국 무역투자청 전략고문은 “디자인산업을 진흥한 것은 다른 산업의 발전에도 큰 도움을 줬다”며 “일반적 제조업은 해외로 갔지만, 엔지니어링과 결합된 하이엔드 제조업은 여전히 영국의 강력한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재규어, 랜드로버의 디자인을 도맡아하던 내부 디자인스튜디오였던 포피플은 2004년 독립 이후 고부가가치 디자인에 주력해 성공한 기업이다. 특히 장인정신을 강조한 `영국항공(British Airway)`의 일등석 디자인은 이 회사가 영국항공의 서비스디자인은 물론 전 좌석 디자인을 총괄하는 전속 계약까지 맺는 결실을 거뒀다. 4명에서 출발한 회사는 이른바 `스타디자이너` 없이도 현재 임직원이 70여명에 이르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디자인회사로 자리 잡았다.
데이비드 섬머필드 포피플 대표는 “제품이든 서비스든 사람에서 시작해 사람에서 끝내는 것이 포피플의 디자인 철학”이라며 “일등석 좌석의 스티치 간격 하나까지 직접 공방을 수소문해 샘플을 만들고 디테일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영국은 산업간 융합과 혁신의 단초도 경계를 넘나드는 디자인문화에서 찾았다. 아래에서 위로, 문화에서 산업까지 전방위를 아울렀다. 런던디자인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열린 빅토리아앤드알버트미술관의 디자인 전시에서는 세계 최초로 3D프린터로 만들어진 권총도 만나볼 수 있다. 이 총은 디자인이 발전하면서 사회문제와 충돌하는 상징적 사례로 여겨 미술관이 3D프린터 권총을 제작자로부터 직접 매입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런던 디자인미술관은 `미래가 여기에(The future is here)`전시를 개최해 3D프린팅과 CNC 가공을 미래 제조업을 이끌 기술로 선보였다.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다양한 응용사례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했다. 이미 영국의 바스대학은 3D프린터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주도하면서 3D프린팅의 대중화에 기여한 바 있다.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으로 이뤄진 3D프린팅 및 CNC 가공 제품을 전시하는 것은 물론 관람객이 현장에 마련된 PC 홈페이지에서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으로 3D프린팅 제품을 주문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전시는 영국의 기술전략위원회(TSB) 후원으로 기획됐다.
알렉스 뉴슨 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는 “CNC 기술은 오래됐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밍 기술 및 디자인이 발전하면서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며 “디자인과 기술이 어떻게 활용되고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지 관람객들이 직접 경험하고 관찰하면서 스스로 창의적 제품을 만드는 방법은 물론 비즈니스 기회 창출까지 고민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런던(영국)=
김명희기자 noprint@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