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다. 올해로 16년째다. 자식에게 선물해도 부끄럽지 않은 책, 제대로 된 책, 정직한 책을 만드는 게 그의 신조다. 수입은 신통치 않다. 그래도 그는 늘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실천하고 산다. 학창시절 독서광이었던지라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고, 또 사람들에게 보여줄 책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친다고 생각하는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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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들여 키운 직원들이 규모 번듯한 출판사로 회사를 옮길 때도 “어딜 가서도 좋은 책만 만들면 된다”며 등 두드려주는 그다.

오랜만에 사람 좋기로 소문난 그를 만났다. 퇴근 후 소주잔을 함께 기울였다. 취중 잡담 도중 출판계의 책 사재기 얘기가 나왔다.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사재기한 출판사 이름이 등장하는 대목에선 육두문자까지 튀어나왔다. 삼십년 지기지우지만 그렇게 격앙된 모습은 처음이다.

우리 신문사에서도 한때 신간을 소개하는 `북스(books)` 면에 베스트셀러 서적순위를 표로 만들어 게재한 적이 있다. 대형서점이 표를 제공했다. 서점에서 많이 팔린 책을 매주 분야별로 열권씩 추려 표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표 도착시각은 신문사 데드라인에 턱걸이하기 일쑤였다. 대형서점의 담당자가 굼떠서가 아니다. 결재라인에 있는 상급임원의 결심이 늦어서다. 결재과정에서 순위가 바뀌었다며 서점에서 수정을 요구할 때도 있었다. 임원의 결재가 필요하고, 결재도중 순위에서 책이 들고날 수 있다는 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업계 관행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출판사가 발행한 책의 발행부수는 8690만6643권, 전년 대비 20.7%가 감소했다. 1년 전에 비해 2265만권이나 덜 찍었다고 말하는 게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하락세가 가파르다. 출판시장은 갈수록 황폐해져 간다.

베스트셀러 한 권만 제대로 건지면 10년을 먹고산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한 권 건지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양질의 콘텐츠는 기본이고, 유명한 작가, 그 작가에게 지급할 막대한 선인세, 엄청난 규모의 광고홍보 비용을 쏟아부을 준비가 됐을 때야 비로소 그 가능성이 커진다. 베스트셀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고 만들어지는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책 내용만 좋으면 입소문을 타고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 순진한 생각이다. 그 입소문의 상당부분이 입이 아닌 사람 손으로 만들어지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초기 음원차트를 장악하기 위해 가요 기획사들이 음원을 사재기하는 관행도 서적 베스트셀러 만들기와 다를 바 없다. 결국 이들 농간에 피해를 보는 건 대중과 동종 업계 경쟁사다.

두 달 전 소설가 몇 명이 출판계 사재기 관행에 대한 검찰 수사를 촉구했다. 검찰과 공정거래위원회가 서로 핑퐁게임을 벌인다. 처벌 규정이 마땅치 않아서다. 처벌 규정은 출판문화산업진흥법의 1000만원 이하 과태료 처분이 전부다. 단순한 행정처분이다. 피해자와 부당이득을 챙긴 자가 존재하는데도 이를 바로잡을 규정이 없다. 분명 제도적 모순이다.

들끓었던 여론은 두 달 사이 양은냄비 식듯 잠잠해졌다. 이대로라면 다시 원점이다. 그래선 안 된다. 출판시장을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도박판으로 왜곡시키는 비현실적 현실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자라나는 꿈나무에 자양분을 공급할 목적으로 존재하는 `착한` 출판사들이 좌절하는 일이 없도록 고칠 것은 꼭 고쳐야 한다.


최정훈 정보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