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소프트웨어(SW)를 사면 포장지에 일정한 계약 조건을 인쇄해 놓은 다음 “이 SW를 구매하여 사용하는 경우(혹은 포장지를 뜯은 경우) 계약 조건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취지의 문구가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인쇄된 조건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SW 무단 복제와 재판매를 금지하는 내용이나 기타 사용과 관련한 제약 조건 등이 대부분이다.
요즘에는 온라인에서 필요한 SW를 다운로드 받는 경우도 흔하다. 이 때도 해당 사이트에 계약조항을 기재해 놓고 계약 조항에 동의한다는 버튼을 클릭하는 경우에만 다운로드가 되도록 해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자를 이른바 `포장지 계약(shrinkwrap license)`이라고, 후자는 클릭을 한다고 해 `클릭 온 라이선스(click on license)`라고 부른다.
클릭 온 라이선스는 적어도 구매자가 필요한 SW를 다운로드하기 전에 계약조항 동의여부를 확인하는 버튼을 클릭하는 행위라도 있다. 그러나 포장지 계약은 구매자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SW를 구매한 후 포장지를 뜯어 사용하였을 뿐 달리 포장지에 일방적으로 인쇄되어 있는 조건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시한 적도 없다. 그러한 조건을 지켜야 하는 것인지(즉, 계약이 성립된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계약은 반드시 명시적으로 계약 내용에 동의한다는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아도 행위 등으로 상대방이 제시하는 조건을 수락한다는 의사를 나타내는 방식으로도 성립될 수 있다. 이 형태의 계약도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포장지계약은 저작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저작물에 대해 저작권이 인정되는 근거를 `저작자의 정신적 노동에 대한 대가`로 보는 노동이론의 입장에서 창작성이 아주 낮은 경우도 저작물성을 인정했다. 알파벳 순서에 따라 전화번호 가입자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나열돼 있는 전화번호부를 경쟁업자가 무단 복제해 저작권 침해여부가 문제된 사건(무단 복제를 행한 회사의 이름을 따 `파이스트(Feist) 사건`으로 불림)이 있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전화번호부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과 수고를 인정하면서도 전화번호 가입자에 정보를 단지 알파벳 순으로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저작물의 성립요건인 이른바 창작성을 인정할 수 없어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전화번호부는 일종의 데이터베이스(DB)와 같다. 파이스트 판결에 따르면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 제작한 데이터베이스가 저작권으로 보호받지 못할 수도 있게 됐다. 이는 정보산업 전체에 큰 피해를 야기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때문에 포장지 계약과 같은 형태로 자신의 저작물이 보호받지 못하는 사태를 방지하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런 배경에서 발전한 포장지계약은 국내에서도 다양하게 활용이 되고 있다. 그런데 판매자가 일방적으로 적어 놓은 조건은 언제나 유효한 것일까. 포장지계약은 그 형태를 고려할 때, 이른바 `약관`에 해당되는 것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 (약관법)이 적용된다. 약관법은 고객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조항은 무효라는 취지를 규정하고 있는 등 고객의 보호를 위한 여러 장치를 두고 있다. 포장지계약 내용이 구매자에게 부당하게 불리하다면 구매자는 약관법을 들어 판매자를 상대로 부당한 조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라이선스 관계에 있어서도 이른바 견제와 균형의 원칙은 필요하다. 법은 약관법 등 다양한 견제수단을 통해 이를 구현한다. 라이선스 권리를 인정하는 기본 취지가 이를 통해 사회 전체 발전을 도모하는데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권리의 행사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이의 `정당한` 행사라 할 것이다.
민인기 법무법인 태평양(BKL) 변호사 ingi.min@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