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새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있다. 임기 동안 국정을 끌고 갈 핵심 어젠다를 발표하는 일이다. 그 다음으로 하는 일은 지난 정부 색깔 지우기다. 이명박 정부 초기엔 참여정부의 캐치프레이즈였던 `혁신`이라는 단어가 금기시됐다. 정부조직과 산하기관 조직도에서 혁신이라는 단어가 빠졌다. 각종 연구용역이나 보고서에서도 혁신이라는 말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혁신 피로감이 없지 않았지만 새 정부가 들어서자 혁신이라는 말은 눈 깜짝하는 사이에 자취를 감췄다.
박근혜 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박 대통령이 예비후보 시절부터 강조한 `창조경제`가 핵심 어젠다로 자리 잡았다. 지난 정부의 핵심 어젠다였던 `저탄소 녹색성장`은 벌써 뒤안길에 숨은 단어가 됐다. 일각에서는 새 정부가 녹색 지우기에 나섰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대통령직속 녹색성장위원회는 국무총리 산하로 옮겨가면서 축소됐다. 실무를 담당해 온 녹색성장기획단은 미래전략녹색성장지원단(가칭)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도 축소되는 모양이다. 다른 위원회처럼 이름만 내건 형식적인 기구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새 정부가 새로운 의제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굳이 지난 정부가 잘 해 온 일까지 애써 지워야 하는 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참여정부의 혁신이나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는 어느 한 시기에만 반짝하는 이슈가 아니다. 국가나 산업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중요한 어젠다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더라도 정책이나 기업 경영 속에 녹아 있어야 한다. 변화와 혁신이 없이 안주하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에 진입하고 얼리무버(선도자)형 국가로 올라서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 들이다. 창조경제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와 기업이 존재하는 한 필요한 요소다.
기후변화와 녹색성장도 그렇다. 어느 한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질 어젠다가 아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요인 중 하나가 기후변화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선을 치르는 와중에 불어 닥친 허리케인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일본 역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기후변화 대응과 신재생에너지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국제사회에서도 기후변화 대응과 온실가스감축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문제는 기후변화 대응이나 온실가스감축이 단기간에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십 년 이상 관심을 갖고 대응해야 할 일이다. 우리나라가 주도해서 국제기구로 자리 잡은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나 힘겹게 국내에 유치한 녹색기후기금(GCF)도 이제 시작이다. 정부가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이들 기구의 성패를 가를 수도 있다.
이제 5년마다 되풀이하는 `지난 정부 지우기`에서 벗어나 국익을 위해서라도 계승할 것은 계승하고 발전해 나가야 한다.
주문정 논설위원 mjjo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