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은 자라서 꼭 공무원이 되거라.”
30여년 전 상공부 구내식당에서 친구 부친이 나와 친구에게 건넨 당부의 말이다.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친구 손에 이끌려 광화문에 있는 상공부를 방문했다. 방학 중 관공서 견학기회를 제공하려던 친구 부친의 배려다. 당시 친구 부친은 상공부 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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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무원이 돼야 하는지 되묻지 않았다. 그 때는 너무 어렸다. 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해야 공무원이 될 수 있는지 몰랐다. 고등학생·대학생이 돼서도 내내 생각했다. 많고 많은 직업 가운데 왜 공무원일까.
연초에 장래희망에 관한 통계 하나가 나왔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초중고생 학부모 909명을 대상으로 자녀에게 기대하는 직업을 물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는 자녀가 의사, 교사, 공무원이 되길 희망했다. 중학생 부모는 교사, 공무원, 의사로 순서만 바뀌었을 뿐 선호하는 직업은 다르지 않다. 자녀의 생각은 부모와 딴 판이다. 운동선수, 교사, 연예인이 되는 게 꿈이다. 부모의 기대치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각박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부모 입장에서는 내 아이가 정년이 보장되면서 존경을 받는 직업을 택하길 원한다. `을`로 살기보다는 `갑`이 되길 바라는 게 부모의 심리다. 아이는 가치관이 형성되기 이전이니 부모 뜻을 따르기 십상이다. 2주 전 지상파 한 퀴즈쇼에서 초등학생 1000명이 꼽은 장래희망 1순위는 뜻밖에도 공무원이었다. 그리 답한 초등학생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공무원의 이미지가 부디 `철밥통`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다시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친구 부친은 나와 친구에게 공무원이 되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지금의 여느 학부모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친구 부친은 단서를 달았다. “그러려면 네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 또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열심히 공부해서 최고 전문가가 돼야 한다.”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공무원을 접하다 보니 이제야 친구 부친의 말뜻이 이해된다. 그가 원한 건 `철밥통`의 공무원이 아닌 전문지식을 갖춘 기술관료 즉,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였다는 것을.
경제난으로 국가 위기를 맞고 있는 이탈리아에 이어 그리스가 위기탈출 해법으로 테크노크라트 정부 구성을 추진 중이다. 정치색을 배제하고 과학적·전문적 지식과 능력을 갖춘 기술관료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해 위기를 극복하자는 취지다. 그 말을 뒤집어 보면 지금의 국가 위기 배후에는 무책임한 정치인과 그를 추종한 정치 공무원이 넘쳐 났다는 의미다. 정치인이 당리당략과 집권욕에 매몰돼 국가를 방치할 때, 정치 과잉으로 국가를 위기로 내몰고 있을 때 중심을 제대로 잡아 줄 주체가 바로 테크노크라트다.
과거 청문회에서 정책의 흠결을 따져 물을 때 “우리 공무원은 영혼이 없는 집단이 아니냐”고 항변하던 고위 공무원의 모습은 듣는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또 그리 말한 이가 한둘이 아니라는 점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파멸로 이끌고 그의 영혼을 완전히 거두기 위해 80년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하고도 메피스토펠레스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메피스토펠레스가 우리나라 상황을 눈여겨 봤더라면 널려 있는 주인 잃은 영혼에 쾌재를 불렀을 지도 모를 일이다.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위해 테크노크라트 양성과 발탁은 매우 중요하다. 더불어 그들이 제 목소리를 당당히 내고 낼 수 있는 보호장치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라나는 꿈나무들의 장래희망이 지금의 공무원이 아닌 테크노크라트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최정훈 성장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