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에서 잇몸 수술을 한 조준범씨(42)는 해당 질병 보험금을 받으려 보험사에 진단서를 제출하고 진료코드를 확인해 알려줬다. 그러나 며칠 후 보험사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진료코드가 달라 보험금 지급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후 조 씨는 치과에 여러 차례 다시 문의했지만 동일한 코드번호만 알려줬다. 결국 조 씨는 여러 서류를 발급 받아 겨우 보험금을 받았다.
#미국인 A 씨는 한국 방문 중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돼 국내 한 대형 병원을 찾았다. 미국에서 오랜 기간 진료를 받았기 때문에 미국 병원 주치의로부터 진료정보를 메일로 받아 한국 병원 의사에게 전달했다. 기초 검사를 받지 않고 바로 진료를 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미국 병원에서 받은 진료정보를 국내 병원에서 활용할 수 없었다. 결국 국내 병원 의사는 A 씨 말에 의존해 진료를 했다.
위 두 사례는 국내 병원에서 사용하는 의료정보 체계가 표준화돼 있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 사례다. 대형 병원을 중심으로 국내 많은 병원이 앞다퉈 전자의무기록(EMR) 시스템 등 의료정보시스템을 갖췄지만 정작 시스템 속에 있는 데이터는 모두 제각각이다. 심지어 병명이나 증상 등 용어체계도 표준화가 이뤄져 있지 않다.
◇병원 간 의료정보 공유, 왜 안 되나
의료정보가 공유되지 못하는 것은 병원마다 적용하는 표준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국내 대형 병원은 EMR 시스템 등 차세대 의료정보시스템을 구축하면서 국제표준을 적용했다. 그러나 문제는 적용한 국제표준이 모두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만든 기관과 적용 분야에 따라 국제표준이 여러 개 존재해 병원마다 선택해 사용하는 것이 다르다. 국제표준은 지속적으로 항목을 추가해 상당 부분은 상이한 상태로 중복됐다. 의료IT 업체 개발자는 “대형 병원은 제각각이라 하더라도 국제표준을 적용, 내부적으로는 표준체계를 마련했다”며 “그러나 병원마다 채택한 표준이 모두 달라서 병원 간 통일된 표준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형 병원의 의료정보 표준화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재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중소형 병원은 표준체계를 적용한 의료정보시스템 구축은 엄두도 못 낸다. 의료정보시스템 개발 시 국제표준을 적용하면 인건비 상승과 개발기간이 길어진다. 사업비 부담이 그만큼 커진다. 일부 중소형 병원은 병원 내부에서 사용하는 의료정보조차 표준화가 안 돼 협진 시 어려움을 겪는다.
의료정보 표준화를 보는 의료진의 부정적 인식도 문제다. 상당수 의료진은 의료정보 표준화가 의사의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반대한다. 의료정보 표준화로 진료내용이 공개돼 오진 문제가 제기될 것도 우려한다. 표준화로 새로운 의료 용어와 코드체계를 사용해야 하는 것도 불편하다.
표준화로 기존 의료정보 데이터를 모두 수정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다. 상당수 병원은 길게는 10년, 짧게는 3~4년 전부터 의료정보시스템을 구축해 사용 중이다. 그만큼 많은 의료정보 데이터가 쌓여 있다.
표준화를 하려면 이들 데이터를 모두 수정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 속에 의사의 서명이 데이터로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향후 진료 사고 시 책임소재를 가리기 위해서다. 의료정보 데이터를 수정하면 이에 맞게 해당 의사의 서명도 모두 다시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시 발급된 진단서와 수정된 진료정보가 달라 의료 분쟁의 구실이 될 수 있다.
◇의료정보 표준, 어떻게 해야 하나
의료정보를 표준화하려면 정부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범정부 차원의 의료정보 표준 제정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여러 종류의 국제표준 중 일부를 선택, 국내 실정에 맞게 보완하고 국가 표준으로 만들어야 한다. 국가 표준을 적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해야 한다.
원격의료 시행 등 헬스정보통신기술(ICT)을 반영한 의료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됐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의료법과 개인정보보호법 간 상충되는 부분도 해결해야 한다. 전자의무기록 관리 보존 관련 법규도 정비해야 한다.
표준 적용 시 부여하는 혜택도 마련해야 한다. 의료정보 표준화를 국·공립 의료기관은 물론이고 민간 의료기관까지 확대 적용하려면 인센티브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대형병원 최고정보책임자(CIO)는 “현재처럼 표준 의료정보 체계를 적용하는 데 규제도 혜택도 없다면 병원은 비용 부담이 되는 표준 적용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의료정보 표준화는 보건복지부 한 부처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여러 부처가 의료정보 표준화에 관여해야 한다. 보건복지부는 물론이고 국토해양부·국방부·행정안전부·교육과학기술부·식품의약품안전청 등 중앙부처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건강보험공단 등 관련기관이 참여하는 범정부추진기구를 설립해야 한다. 부처 간 논의를 주도할 의료정보 표준화 컨트롤타워도 필요하다.
정영복 기술표준원 스마트의료정보 국가표준코디네이터는 “표준화는 정책·제도·서비스·연구개발(R&D) 지원 등과 연계, 추진해야 한다”며 “강력한 범부처 협력체계를 구축, 인센티브 제도를 포함한 다양한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의료정보 표준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보건복지부와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 중심으로 표준화에 노력하고 있다. 가천의대길병원, 분당서울대병원 등을 중심으로 병원도 표준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연구개발이나 시범사업 수준에 머물러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의료정보 표준화는 무엇보다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며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 정부차원의 의료정보 표준화 추진계획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해외에서는 어떻게 하나
의료정보 공유를 범국가적으로 추진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호주다.
호주는 지난 2005년 의료정보 표준화 전담조직인 `e헬스이행국(NEHTA)`을 연방정부 내에 설립했다. NEHTA는 헬스케어 시스템 간 호환성 문제 해결과 환자 및 공급자 의료정보 활용을 확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보건의료정보 통합 인프라와 표준을 제정, 보급하는 일도 한다.
NEHTA는 국가 e헬스 아키텍처와 표준도 정의하고 제공, 지원한다. 국가 인증서비스와 안전한 건강정보 접근을 위한 프레임워크도 개발, 제공한다. 국가 차원 e헬스 거버넌스 모델 수립과 프라이버시 관련 법규도 제정한다.
지난해 개인조정전자헬스기록(PCEHR) 시스템을 구축, 가동했다. PCEHR 시스템은 개인이 국가시스템에 접속해 건강정보를 진료지역에 관계없이 관리할 수 있도록 한 정보시스템이다. 일부 지역에서 운영하는 시스템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미국도 과거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면서 범정부 차원으로 강력하게 의료정보 표준화를 추진했다. 국가 헬스IT코디네이터를 설치, 국가 차원에서 모든 역할을 통합하고 조율한다. 이는 오바마 대통령의 후보시절 공약이기도 했다.
신혜권기자 hksh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