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특허전쟁에 이어 세계 통신장비 시장에도 보호무역주의가 고개를 들었다. 미국과 중국 정부가 나서 첨예한 외교전까지 불사한다. 미국은 최근 우리 정부에 공공기관 통신장비 시장 개방 압력을 넣은 것도 확인됐다.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의 기반인 통신장비 시장 주도권을 놓고 글로벌 기업을 대신해 정부가 나서는 양상이다. 시스코, 화웨이 등 미국과 중국 기업은 이미 자국 정부를 내세웠다. 보안 등을 명분으로 산업 보호 장벽을 높인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소극적이다. 통신장비 보호무역전쟁의 실태와 대안을 2회에 걸쳐 긴급 진단한다.
미 하원은 지난해 10월 정보위원회 보고서에서 “화웨이, ZTE 같은 중국산 통신장비 기업이 미국 기업을 인수합병(M&A)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중국의 사이버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정부기관에서 이들 회사 장비를 사용하지 말 것”을 주문해 정부 압박 강도를 높였다.
미 하원은 미국 내 중국산 통신장비 도입률이 높아지며 중국 엔지니어가 자국 핵심 네트워크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보안 위협`을 이유로 꼽았다.
중국은 곧바로 상무부 등 외교 채널을 이용해 “미국의 보고서는 주관적인 추측일 뿐 실제 증거가 미비하다”면서 “여러 가지 사실무근한 유언비어와 억측만 담았다”고 받아쳤다. 실력행사도 나섰다. 10월 이후 중국 공공조달 사이트에서는 일부 미국 통신장비 회사의 진입이 차단됐다. 사실상 보복에 나선 것이다.
런정페이 화웨이 CFO는 21일 실적발표 기자회견에서 “화웨이가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미국의 주장은 소비자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보호무역주의”라고 비난했다.
미·중 통신장비 무역 분쟁 뒤에는 화웨이, 시스코 등 글로벌 통신장비 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 2~3년간 화웨이 등 중국기업이 글로벌 선도 기업인 시스코, 에릭슨의 턱밑까지 쫓아올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장지영 한국네트워크산업협회 부회장은 “세계 곳곳에서 통신 인프라가 깔리고 있지만, 여기에 들어가는 장비 생산기술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몇몇 국가만 보유하고 있다”며 “ICT 생태계가 확장될수록 자국 기업의 영향력을 지키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국은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법`에 근거해 WTO GPA(정부조달협정)에도 불구하고 미국 공공정보화 사업인 국가초고속망 구축 시 NAFTA(미국, 캐나다, 멕시코)와 이스라엘 지역에서 생산되는 통신장비를 가격기준 50% 이상 구매하도록 제한했다. 사실상 자국 생산 장비를 우선순위에 둔 것이다. WTO GPA 조항과 다른 지침으로 자국 보호산업 무역장벽을 높이는 추세다.
통신장비 엔지니어를 다수 보유한 인도 역시 최근 자국 정부에 통신장비를 비롯한 IT제품 쿼터제를 실시해 외산 비율이 30%를 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다만 글로벌 기업도 인도 내에서 장비를 생산하면 국산으로 인정하는 단서를 달아 기술이전 기반을 마련했다.
미국·중국·인도 등이 노골적으로 보호무역주의를 표방하는데 반해 한국 정부는 너무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2011년부터 시행된 `지식경제부 IT·네트워크장비 구축·운영 지침`이 거의 유일한 정부 통신장비 조달 지침이다. 이마저도 국산 장비 우선이 아닌 중소기업(국산, 외산 불문) 지원에 초점이 맞춰졌다.
미국 정부는 최근 이 지침마저 문제 삼으며 무력화하려는 움직임이다. 자국 기업의 판로를 정부가 앞장 서 열겠다는 의지다.
장비업계 한 사장은 “미국, 중국 등은 정부가 나서 무역장벽을 높이거나 상대 국가 규제를 제거하면서 자국 기업의 판로를 개척한다”며 “우리 정부도 상호호혜의 원칙에 입각해 자국 산업 보호와 시장판로 개방에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