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한정 물량으로 국내 출시됐던 포드 몬데오는 참 특이한 차였다. 벨기에에서 생산된 유럽산 중형차로, 당시 고급 대형차에서나 볼 수 있었던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과 어댑티브 바이제논 헤드램프, 스마트키, TPMS, 5단계 온열/통풍 시트 등을 3,850만원의 가격에 제공했다. 차체치수는 길이가 짧은 것을 제외하면 당시의 에쿠스보다 컸는데, 2.0리터 디젤 엔진의 출력이 130마력에 그쳐 아쉬움을 남겼었다. 그래도 유럽에서 정평 난 그대로 핸들링은 출중했다.
그때 탔던 몬데오는 4세대 모델이었다. 이번에 탄 미국 국적의 2013 포드 퓨전은 유럽 포드의 5세대 몬데오와 기본적으로 같은 모델이다. 2012 퓨전만 해도 몬데오와는 관계가 없는 미국 시장용 미국 차였지만, 이제 ‘원 포드’ 전략에 따라 유럽 포드와 미국 포드의 중형차가 같은 모델로 개발, 판매된다.
대형 세단으로 차체를 키운 토러스를 대신해 포드의 중형차 자리를 맡게 된 퓨전은 2005년에 2006년식으로 처음 탄생했고, 이번이 2세대 째에 해당한다. 기존 모델은 6년간 100만대 이상이 판매되는 등 미국 시장에서는 꽤 많이 팔렸고 평가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까다로운 한국 시장에서 호응을 얻을만한 디자인이나 품질은 갖추지 못한 미국 시장용 차였다. 2013 퓨전은 완전히 다른 차로 보면 된다. 구형 몬데오보다도 더 유럽차-특히 독일차 같은 특성을 자랑한다. 서두부터 2012 퓨전이 아니라 4세대 몬데오를 언급한 것도 이 때문이다.
포드와 달리 경쟁사들 상당수는 미국시장에 특화된 모델들을 투입하고 있다.‘오리지널 저먼’을 내세우는 폭스바겐조차 신형 파사트를 유럽용과 미국용으로 분리 개발하고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뒤늦게 수립된 원포드 전략이 미국시장의 주력인 퓨전을 통해서는 어떤 성적표를 받게 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원포드라고는 하지만 유럽 포드와 미국 포드가 공용할 수 있는 것은 각 시장에서 통용되는 차체 크기상 몬데오급을 한계로 볼 수 있다. 몬데오의 경우 기존 모델이 나오면서 이미 차체가 대폭 커진 느낌이 있었고, 5세대 몬데오에 해당하는 이번 퓨전의 경우에는 4세대 몬데오와 동일한 2,850mm의 휠베이스를 유지하면서 전장은 조금 더 늘렸다. 이전 퓨전과 비교하면 모든 치수가 더 크고, K5등과 비교해도 그렇다.
4세대 몬데오의 경우 유럽 포드의 ‘정지해 있어도 움직이는 듯한- 키네틱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유럽차답지 않게 다소 헐거워 보이는 면이 있었는데, 새 퓨전은 단단하고 속이 꽉 찬 유럽차 느낌을 잘 살렸다. 얼굴은 ‘자동차가 한계를 만날 때’라는 타이어 광고에 등장하는 애스톤 마틴 스포츠카를 연상시킨다. 애스톤 마틴이 과거 포드 산하에 있었기 때문에 닮은 것은 아닐 것이다.
공기저항계수는 0.27에 불과하다. 기둥들은 얇으면서도 약하지 않게 설계했다. 운전자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도록 대각선으로 길게 배치된 A필러가 눈길을 끈다. 늘씬한 뒷유리 끝으로 이어지는 짤록한 트렁크는 유럽 몬데오의 해치백 모델을 연상시킨다. 과감한 볼륨감 구현을 위해 트렁크 덮개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다. 테일램프를 따라 위로 쫑긋 솟은 트렁크 라인은 4세대 몬데오의 디자인을 계승한 것이며, 테일램프 디자인 역시 유럽 포드의 패밀리 룩을 따랐다.
쿠페를 연상시키는 지붕 및 뒷유리 라인에도 불구하고 뒷좌석 머리 공간은 좁지 않다. 오히려 높이 앉은 느낌으로, 다리공간과 발 공간도 부족함 없이 뽑아냈다. 뒷좌석 햇빛가리개나 온열 기능이 없는 대신, 등받이는 어깨 쪽 레버를 이용해 간편히 분할 접이할 수 있도록 했다. 주로 미국식 차들이 트렁크에서 레버를 당겨 쓰러뜨리도록 하는 것과 비교된다. 시트는 두텁지 않으면서도 깊고 탄탄한 지지면을 갖춰 안락함과 안정감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실내 역시 구형 퓨전은 물론 이전 몬데오보다 한결 나아 보인다. 4세대 몬데오는 화려한 그래픽의 ‘컨버스 플러스’ 계기판이나 소니 오디오등 눈길을 사로잡는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조화가 떨어져 유럽차의 느낌이 부족한 것은 둘째치고 촌스럽기까지 했다. 새 퓨전은 일부 소재가 푸석해 보이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젊은 감각의 디자인으로 많은 부분을 만회하고 있다. 특히, 오디오와 공조장치는 물론 선루프와 조명 버튼에 이르기까지 어지간한 조작부는 죄다 터치 방식이라 누르는 버튼이 귀하다.
다른 최신 포드차들처럼 4.2인치 LCD를 2개 배치한 계기판과 8인치 내비게이션 모니터를 통해 마이포드 터치(MyFord Touch®)를 구성하고 있어, 음성인식 ‘싱크(SYNC®)’나 터치 스크린, 운전대의 쌍십자 버튼을 통해 차량의 각종 기능을 통합 제어할 수 있다. 스티어링휠 온열 기능은 없으나 스마트키에 원격 시동 기능이 있어 추울 때뿐 아니라 더울 때에도 요긴하다. 와이파이 핫스팟 기능도 있고, 스피커 12개짜리 390와트 소니 오디오 시스템을 갖췄다. 에어백은 8개이고 주차브레이크는 손가락만 까딱하면 되는 전동식이다.
이전 몬데오와 마찬가지로 퓨전 ‘TITANIUM` 트림의 경우에는 차선 이탈 방지 시스템,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액티브 파크 어시스트 등 동급 경쟁모델들의 국내 출시 사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첨단 고급 사양을 제공하기도 한다. 내년에는 하이브리드 버전도 국내 출시될 예정이다.
올해 우선 국내 출시된 것은 1.6리터 SE와 2.0리터 SE 트림인데, 엔진 외의 사양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수입 중형차들은 2.5~3.5리터 엔진을 탑재하는 것이 보통인데, 결코 작지 않은 덩치에 1.6리터~2.0리터 엔진을 탑재했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이들은 포드가 강하게 내세우고 있는 ‘에코부스트’ 엔진들로, 가솔린 직분사 터보 기술을 통해 기존 퓨전의 2.5리터와 3.0리터 엔진을 각각 대체하고 있다. 포드는 이스케이프에 이와 동일한 엔진 체계를 갖추었고, 익스플로러, 토러스 등에도 에코부스트를 접목해 다운사이징을 실현했다.
시승차인 2.0 SE는 5,500rpm에서 234마력의 최고출력을 내고, 3,000rpm에서 37.3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한다. 쏘나타, K5 터보의 270마력과 비교하면 떨어지지만, 저중속 영역의 체감 성능은 뒤지지 않는다. 풀 가속시의 사운드 등을 고려하면 오히려 더 잘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반대로 엔진 시동이나 정속 주행 등에서는 정숙성이 두드러진다. 너무 얌전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 이러한 특성은 3.0리터 V6를 대체하는 이 엔진의 성격에 맞춰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변속기는 6단 자동이고, 스포티한 형상의 운전대 뒤로 변속 패들을 장비했다. 별도의 수동모드는 없지만 S모드로 옮긴 뒤 패들로 조작하면 된다. 수동 모드에서는 시프트업이 지연되지만 강하게 밟을 경우에는 끝까지 버티지는 않는다. 킥다운도 가능하다.
서스펜션은 전륜 맥퍼슨 스트럿, 후륜 멀티링크이고, 전자식 파워스티어링을 적용했다. 운전대는 저속에서 가볍다가 속도가 더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묵직해진다. 반응은 예민하고 빠른 편이다. 이와 더불어 승차감 면에서도 미국식의 부드럽고 출렁거리는 타입과는 거리가 있어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미국차와 유럽차 혹은 독일차의 타협점을 찾으면 이 정도가 되는 것일까? 구동계와 더 면밀하게 연결된 느낌은 호불호가 나뉠 수 있겠지만 고만고만한 차들 가운데서는 내세울 수 있는 개성이다. 작고 민첩한 차를 운전하는 느낌이 들다보니 막상 주차할 때는 차의 크기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연비인데, 1.6은 10.8km/L, 2.0은 10.3km/L(공인 복합 연비)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사실, 가격도 각각 3,645만원과 3,715만원으로 비슷하게 책정됐다. 그래도 1.6을 선택한다면 세금을 적게 낸다는 장점 외에, 다른 브랜드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1.6리터 중형차’를 탄다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