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규모 프린터 제조업체 사장 최씨는 요즘 제품을 구석구석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프린터에 불필요한 부품은 없는지, 무게를 더 줄일 방법은 없는지 연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경쟁업체 사장 박씨가 최근 에코디자인을 적용해 수익을 늘린 사례가 신문·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최씨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2년 전 박씨가 프린터 제조과정 개선에 투자를 권유했을 때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전기·전자제품 `재질`과 `구조`를 바꿔라
전기·전자제품은 제조부터 폐기까지 전과정에서 환경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환경영향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기업의 필수 활동으로 자리매김 했다. 환경보호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제조비용 저감, 이미지 제고에도 도움이 돼 세계 유수 기업들은 앞다퉈 관련 사업에 나서고 있다.
유해물질 사용을 줄이고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폐기단계에서 규제를 강화하는 것보다 설계·제조단계에서 예방하는 게 효과적이다. 전문가들은 제품 설계단계에서 제품 전과정에 걸쳐 발생되는 환경영향의 80%가 결정된다고 분석한다.
우리나라는 주요 전자제품 제조 시 유해물질 사용을 제한하고 제품 폐기단계에서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해 제조·수입업자를 대상으로 재질·구조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전기전자제품 및 자동차의 자원순환에 관한 법률`에 따라 10대 품목(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 에어컨, 오디오, 휴대전화 단말기, 컴퓨터 등)의 제조·수입업체는 전기·전자제품의 재질·구조개선 지침에 의거해 대표 모델의 환경성을 평가해야 한다.
지침은 수입·제조업자는 유해물질 사용억제와 재활용 촉진을 위한 기술개발 노력, 재활용 촉진을 위한 재질·구조개선 등을 수행해야 한다.
재질개선을 위해 제조업자는 플라스틱 재질 부품과 관련 재질 종류의 단순화,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의 사용 확대 등을 설계단계에서 반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구조개선을 위해서는 재활용이 가능한 부품의 경우 재질별로 분리가 용이한 구조로 개선, 처리하는 경우 해체가 용이한 구조로 개선, 2가지 이상의 재질로 접합된 구조의 경우 단일 재질 사용구조로 개선 등을 수행해야 한다.
◇KEA, 기업지원 `활발`
10대 품목 제조·수입업자는 제품 종류별로 대표모델을 선정해 기준에 따라 재질·구조개선 사항 평가서를 작성하고 기록·보존하는 한편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에 제출해야 한다.
KEA는 기업이 제출한 평가서를 1차 사전심의 한다. 사전심의를 통해 선정한 평가서를 심의하기 위해 학계·연구소 관계자와 재활용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재질·구조 개선사항 심의회를 개최한다. 심의위원은 기업이 제출한 평가서 내용을 검토하고 항목별 개선도를 평가한다. 심의위원의 평가내용은 심의회에 참여한 모든 기업에 전달돼 다음 평가와 제품개발에 반영하도록 권고한다.
김기정 KEA 환경에너지팀장은 “평가서는 분리용이성을 고려한 설계, 재질 재활용을 고려한 설계, 경영시스템 등을 자체 평가해 근거자료와 함께 제출해야 하고 평가 항목·기준은 KEA 단체표준 KEA CE-3300을 따른다”며 “제도 시행 초기 134개에 불과하던 재질·구조 개선평가 참여기업이 올해 228개를 기록해 약 70%의 증가를 보였다”고 말했다.
KEA는 정부의 `전기·전자제품의 재질·구조개선 기반구축사업`을 통해 지난 2009년부터 기업의 에코디자인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사업은 △전기·전자제품의 재질·구조개선 기반 구축 △전자의료기기 산업의 유럽연합 폐전기·전자제품처리지침(EU WEEE) 사전대응 기반구축 △경영시스템의 환경친화설계 방법을 통합 기반 구축 등으로 나눠진다.
KEA의 대표 사업은 재질·구조개선 품목별 시범평가와 가이드 개발이다. 매년 대상품목 중 하나를 선정해 시범평가를 수행한다. 기업의 제품 개발자가 참여해 대상 제품을 직접 분해하고 재활용성을 평가하게 된다. 지난 2010년에는 벽걸이 에어컨, 2011년에는 드럼세탁기, 올해는 양문형 냉장고에 대한 시범평가를 수행했다. 시범평가 결과는 가이드로 제작해 대상 업체에 배포하게 된다.
다양한 중소기업 지원 활동도 수행하고 있다. KEA는 전기전자 환경경영 포럼, 재질·구조개선 교육,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 등을 통해 환경전담인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이 전문인력을 확보해 제품개발에 에코디자인을 반영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KEA는 기업의 에코디자인 적용 제품 개발을 위한 환경친화설계 시범적용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기업 내 환경친화설계 진단지도를 통해 문제점을 도출하고, 각 기업에 맞는 개선점을 제시해 장기적으로 환경성을 고려해 제품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김 팀장은 “에코디자인은 이미 체계를 잘 갖춘 대기업 뿐 아니라 수많은 중소 협력사들에 큰 도전과제이자 기회”라며 “우리나라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정책적으로 추구하고 있는만큼 에코디자인의 파급효과는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재질·구조개선 우수사례
재질·구조개선은 원가절감과 환경영향 저감 등 다양한 혜택을 가져다준다. 이미 많은 전기·전자업체들이 개선작업을 통해 다양한 성과를 내고 있다.
국내 전자업체 A사는 재질·구조를 고려한 설계로 LCD TV의 친환경성을 크게 높였다. 이 회사는 폐제품의 분해·분리를 쉽게하고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해 부품 수를 기존모델 대비 28% 줄였으며, 사용하는 소재 종류도 줄였다. 제품의 중량·부피 저감으로 포장·운반 작업 효율은 높아졌다.
중견 컴퓨터 제조업체 B사는 제품 부피를 50% 줄여 원재료 사용과 폐기물 발생을 크게 줄였다. 납 성분이 들어있는 너트를 무연납 재질로 변경해 유해성을 줄였고, 부품 수 등을 줄여 제품 분해성과 재활용성을 높였다.
컴퓨터 제조업체 C사는 노트북의 재질·구조를 대폭 개선했다. 기업 내부적으로 제품 전과정에 걸친 친환경 설계 프로세스 구축했으며, 친환경 제품개발 활동 결과를 기록·보존할 수 있도록 내부관리체계를 마련했다. 제품 분해성을 높이기 위해 법적 선별처리 대상부품, 작업자 안전에 영향을 주는 부품, 유해물질 함유 부품, 재활용이 가능하거나 경제적 가치가 있는 부품은 하나의 공구를 사용하거나 수작업만으로 분리가 가능하도록 개선했다.
국내 중견 냉장고 제조업체 D사는 접합부품의 재질을 기존 금속에서 플라스틱으로 바꿔 소재를 단일화 하고 중량을 줄였다. 플라스틱 재질표시, 분리배출 기호표시 등과 같은 라벨은 별도의 부착 없이 금형에 새겼으며, 부품수와 플라스틱 종류 등을 줄여 분해성과 자원사용 효율성을 높였다. 이 회사는 재활용 촉진을 위해 매년 생산되는 제품수량 대비 재활용량을 산정하는 체계를 구축해 운영하고 있다. 유해성과 재활용성을 고려한 내부설계 프로세스를 갖춰 신제품 개발과 환경성 평가에 적용하고 있다.
◆전기·전자제품의 재질·구조개선 기반구축사업은
정부는 환경영향 감소를 통한 순환형 녹색경제 시스템 구축을 위해 지난 2009년 12월부터 전기·전자제품의 재질·구조개선 기반구축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KEA가 주관기관으로 다양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3년간 사업이 마무리 된다.
사업은 제품별 재질·구조개선 평가방법과 기준 개발, 제품 시범평가, 컨설팅을 위한 전문가 양성, 전자의료기기 WEEE 대응 가이드 개발, WEEE 대응 적합성 확인 시범평가, 환경친화설계 기준 통합 방법 개발, 환경친화설계 중소기업 교육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KEA는 사업 첫 해 사전평가위원회와 심의회를 개최하고 에어컨 재질·구조개선 사항 세부평가방법과 기준안을 개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했다. 세부평가기준을 적용한 시범평가를 수행했으며 가이드를 개발했다. 제조자와 재활용센터 관계자를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하는 등 전문가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지난해에도 사전평가위원회와 심의회 운영을 지속했으며, 세탁기를 대상으로 국내외 현황을 반영한 재질·구조개선 평가방법과 기준을 도출했다. WEEE 준수 평가 체크리스트를 작성하는 한편 약점을 도출하고, 관련 대응방안 교육을 수행했다.
전기·전자업계는 정부의 기반구축사업을 통해 설계단계에서 에코디자인을 고려함으로써 자원효율성이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관련 국제 환경규제에 대한 대응력이 높아져 지속가능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