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억 이상의 인구를 가진 일본이 부러웠다. 학창시절 배운 짧은 경제 지식이지만 대외 경제거래 없이 자립할 수 있는 이른바 자립경제의 기본 인구는 6000만명 수준이다. 수출 없이 내수로 먹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인구수다. 그래서 충분한 내수시장을 가진 일본이 부러웠다.
어린 마음에 남북통일이 되면 우리도 규모의 경제를 갖춰 단시일 내에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거란 희망도 가져봤다. 20~30년 전의 순진한 기억이다. 지금 내 아이가 그런 말을 내게 한다면 어떻게 설명할까.
이론상으로 자립경제에 근간이 될 인구수는 존재한다. 6000만명은 시간이 지나며 8000만명으로 늘었다가 오늘날은 1억명으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이론이 반드시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다. 사례를 보여준 나라가 일본이다. 국가의 산업구조, 기술자립도, 수입 및 수출의존도, 소득 및 소비 수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과거 일본은 따라 배워야 할 벤치마킹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180도 바뀌어 반면교사의 대상이 됐다.
지난주 일본의 간판 전자업체 소니와 파나소닉의 신용등급이 정크(투자부적격, 투기) 등급으로 강등됐다. 장기불황 늪에 빠진 일본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되는 결과지만 두 회사가 일본 전자산업을 대표하는 상징이자 역사 그 자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격이다. 또 다른 전자업체 샤프는 이보다 서너 단계 더 낮은 강한 투기(Highly Speculative) 등급의 최하위로 추락했다.
일본은 인구도 1억3000만명 수준이고 기술력도 최상위를 유지하고 있다. 소득·소비수준도 여전히 선진국 수준이다. 내수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갖춘 일본이 지금처럼 수모를 겪는 것은 아이러니다. 이론을 거스르는 온갖 변수를 일본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소니와 파나소닉에 대한 피치의 신용등급 발표가 나온 이후 일본에선 원인분석이 한창이다. 한 경제지는 일본을 대표하는 제조기업의 현황을 명과 암으로 비교했다. 미국에서 대단위 리콜사태, 동일본 대지진, 태국 대홍수 등 수년 간 최악의 상황을 경험하고도 흑자를 이어가는 도요타자동자와 최근 5년 사이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며 2조엔(약 26조원) 적자를 낸 파나소닉이 비교대상이다. 신문은 두 회사의 명암을 가른 건 다름 아닌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라 규정한다. 덧붙여 애석하게도 파나소닉에서는 미래 시장을 장악할, 미래를 읽는 제품이 없어 `부활`이란 두 글자를 찾기 힘들다고 말한다. 미래시장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그 시장을 겨냥한 선도기술 개발과 상품화 능력이 서로 달라 기업 간의 명암이 생겼다.
이 분석에서는 빠져 있지만 일본 전자업체가 고전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기업조직의 관료화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던 과거의 창업세대가 떠난 후 오늘날의 경영진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혁신 유전인자가 전수되지 못한 데에서 오는 부작용이다. 그 결과 지금의 상당수 일본 전자기업은 미래를 보는 눈을 잃었다.
원인분석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해결방안을 찾기란 쉽지 않다. 날고 기는 기업분석 전문가라 하더라도 내놓을 수 있는 해법은 구조개혁과 체질개선이라는 원론적 처방뿐이다. 그러나 이 마저도 생존에 필요한 방편일 뿐 다시 선도기업 대열에 올라서는 데 필요한 충분한 처방은 아니다. 구조개혁과 체질개선은 기본이고 여기에 미래를 보는 눈, 미래를 준비하는 능력을 더하지 못하면 도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만고불변의 진리다. 만일 내 아이가 인구수와 자립경제의 상관관계를 묻는다면 일본이 겪은 갈라파고스 증후군 설명과 함께 “무엇보다 중요한 건 미래를 읽는 능력”이라고 답해 주어야겠다.
최정훈 성장산업총괄 부국장 jh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