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남에게 물질적, 정신적 빚을 지고 있다는 부채(負債·debt)가 있고, 더울 때 시원한 바람을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부채(fan)가 있다. 부채(debt)는 심리적으로 무거운 압박감과 부담감을 가중시키지만, 부채(fan)는 심리적으로 가볍고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식히고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 덕분과 덕택으로 훌륭한 업적과 위대한 성취를 이루는 때가 많다. 덕분(德分)이라는 말은 `누구의 덕(德)을 나누어 준다(分)`는 의미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덕택(德澤)은 `누구의 덕(德)으로 그 은혜가 저수지 연못(澤)처럼 가득 차게 되었다`는 의미다. 내가 성공한 것은 스스로 노력하고 실력을 쌓는 노고가 있었지만 더 큰 은혜는 다른 사람 덕분과 덕택에 가능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부채를 지고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부채(負債)는 금전적·물질적 빚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채는 다른 사람의 정신적 도움을 받아 어떤 위치에 올라섰을 때도 지는 것이다. 부채(負債)를 지면 부담감이 가중되고 부채(fan)를 들면 지금과 다른 세상으로 부상(浮上)할 수 있다.
부채는 선풍기와는 다르게 한 번 돌리면 자동으로 돌아가는 기계가 아니라 수고와 정성을 들여 흔들어야 비로소 바람을 일으킨다. 주변에 힘들어 하는 사람, 시련과 역경에 처해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 오랫동안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이런저런 고민을 거듭하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이 바로 부채를 든 사람이다. 내가 든 부채가 일으키는 바람으로 잃어버린 희망과 용기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당신은 지금 부채(fan)를 들고 있나 아니면 부채(負債)를 지고 있나. 비록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남에게 부채(負債)를 지고 살아왔지만 나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얼마든지 부채(fan)를 들고 내가 진 부채(負債)를 갚을 수 있다. 부채는 지고 있다는 부담감보다 들고 있어서 다른 사람을 위해 나도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 기능과 용도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010000@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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