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105>TDX개발 관.산.연 협업체계

TDX― TDX개발 관·산·연 협업체계

제5공화국이 출범한지 6개월이 채 안된 1981년 8월 21일.

신병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이날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신 부총리는 이 자리에서 “경제안정기반 정착을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아 물가안정과 개방 및 자율화를 적극 추진해 나가겠다”면서 “산업구조를 비교우위 중심으로 개편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 5개년 계획에 전자교환기(통신기기)와 반도체, 컴퓨터 등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전화교환기 개발이 국가 주요 정책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 계획은 한국 통신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전자교환기 개발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체신부는 그해 8월 29일 전 대통령에게 시분할교환기 종합검토 중간 보고서를 제출했다.

체신부는 이 보고서에서 시분할교환기의 특징과 사업개요, 추진경위, 전자교환기 도입 현황을 소상히 설명했다. 체신부는 긴급한 시외교환기는 도입하고 시내용 시분할교환기는 기존 국내생산업체를 활용해 국산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체신부는 그해 10월 20일 국산전자교환기개발 기본계획을 마련했다. 전자교환기의 불모지였던 한국이 처음 만든 국산화 설계도였다.

체신부는 개발의 기본방향을 △전전자식 교환기를 개발해 종합정보통신망 구축을 위한 자주 기술을 확립하고 △정보사회 구현에 대비하며 △통신과 컴퓨터 반도체 등 기술 선진화 촉진으로 전자산업의 고도화를 이룩하는 데 두기로 결정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교환기개발 사업은 국가전략사업으로 체신부와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추진하며 △국가 연구기관인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ETRI)가 구심점이 돼 생산업체와 공동으로 개발을 추진하고 △개발기간 단축과 개발성과의 확실성을 높이기 위해 2단계로 나눠 개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1단계는 농어촌과 중소도시형 소형 교환기를 개발하면서 기술을 축적하고 2단계로 대용량 교환기를 개발해 종합정보통신망 실현을 위한 표준 기종으로 발전시키기로 했다.

이같이 정부와 연구기관, 산업체가 공동연구 개발체제를 구축한 것은 전자교환기가 처음이었다. 이런 협업형태의 연구개발은 국내 대형 연구개발의 새 모델이 됐다.

이 사업의 업무를 총괄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지휘부는 체신부가 담당했다. 연구개발비 지원과 제품 구매와 품질관리는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맡았다. 기술개발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ETRI)가 담당했다. 그리고 제품생산은 삼성반도체와 금성반도체, 대우통신, 동양전자통신이 각각 맡았다. 철저한 협업체계였다.

구체적인 업무분담을 보자.

△체신부=정책 결정과 관리. 수요책정 △한국전기통신공사=TDX품질보증단을 중심으로 유관부처와 협조. 개발에 필요한 예산지원. 상용화 시험계획. 공급계획과 구매규격 작성. 기능추가와 개량개발에 대한 규격제시 △한국전자통신연구소=개발업무 종합수행. 개발계획 작성과 시행. 양산기술 연구와 기술전수. 운용과 유지·보수 기술 지원. 추가개량 개발과 지원 △생산업체=기술 전수에 의한 기술개발. 시험기술 개발. 기술축적으로 독자개발능력 배양 등이었다.

이 같은 국가 개발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려면 치밀한 전략이 필요했다.

오명 체신부 차관(체신부, 건설교통부, 과기부총리 역임. 현 웅진에너지 폴리실리콘 회장. KAIST 이사장)의 회고.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내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조직의 틀을 짜는 일이었다. 관련된 여러 부처 및 기관에 어떤 역할을 맡길 것인가. 기존의 팀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 좋을까. 혹은 새로운 팀을 만드는 것이 좋을까. 전전자교환기 개발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기술 못지않게 조직이 중요했다. 체신부를 필두로 한국전기통신공사, 한국전기통신연구소, 여러 생산업체가 참여한 복잡한 프로젝트인 만큼 조직을 잘 구성하지 않으면 일의 진행이 느리고 잡음도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자서전 `30년 후의 코리아를 꿈꿔라` 중에서)

전자교환기 개발비는 240억원이었다. 당시에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비였다.

최광수 체신부 장관(대통령 비서실장, 외무부 장관 역임)은 내심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오 차관을 신뢰하지만 기술개발에 실패한다면 책임문제 등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 장관이 오 차관과 나눈 대화 내용을 들어보자.

△최 장관=240억원을 투입해 우리 기술로 전자교환기 개발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투자비가 마음에 걸리네요.

△오 차관=세상에서 제일 좋은 교환기를 만든다는 것은 과욕이지만 최소한의 성능을 가진 교환기 개발은 충분합니다. 경제성은 별개 문제입니다.

△최 장관=만약 개발한 교환기가 경제성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오 차관=연구를 계속하면서 수입 제품을 사용하면 됩니다. 우리가 교환기를 개발하면 원가계산을 정확히 할 수 있어 수입단가를 깎을 수 있습니다. 5000억원어치 교환기를 구입하면 10%만 삭감해도 500억원을 줄일 수 있습니다. 240억원의 배입니다. 연구개발을 하면서 교환기 구입가를 깎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240억원의 연구개발비는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실패해도 남고, 성공해도 남는 장사입니다.

오 차관의 계속된 증언.

“기획안의 개발비는 240억원이었다. 나는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결재해 주었다. 10억원 프로젝트도 없던 당시로서는 혁명과도 같은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500억원을 요구했더라도 지원했을 것이다. 사실 240억원의 개발비는 선진국들이 전자교환기를 개발할 때 들이는 비용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돈이었다. 우리가 벨기에에서 첫 전자교환기를 도입할 때 지불한 기술료만 해도 약 500억원에 이르렀다. 240억원의 연구개발비는 그때까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금액이었을 뿐,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오히려 적은 돈이었다.”

오 차관은 뒷날 연구소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서 개발비가 240억원으로 계산되었나”하고 물었더니 “연구비를 산정할 정확한 근거 자료도 없고 해서 최대한 불릴 수 있는 데까지 불려서 신청한 금액이 240억원”이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연구개발비 산정에 참여했던 박항구 당시 한국전기통신연구소 교환기기연구실장(TDX개발단장 역임, 현 소암시스텔 회장)의 말.

“체신부에서 개발비를 산정해 제출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당시는 지휘계통을 통해서 개발비를 산정한 게 아니었습니다. 전자교환기 분야를 잘 아는 사람에게 개발비 산정을 맡겼어요. 안병성 박사(작고)와 한국전기통신연구소 두 곳에서 각각 개발비를 산정해 체신부에 제출한 것으로 압니다. 연구소보다 안 박사가 먼저 개발비를 체신부에 제출했어요.”

한국전기통신연구소는 1981년 1월 최순달 소장(체신부 장관 역임)이 취임하면서 세 명의 부소장을 한 명으로 축소했다. 부소장으로 시분할전자교환기 개발을 담당하던 안병성 박사는 그해 8월 대영전자 기술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분할 전자교환기에 관한 한 그는 최고 전문가였다.

체신부는 안 박사에게도 개발비 산정을 의뢰했다. 그가 5년간 필요한 개발비로 산정한 금액은 124억원이었다.

한국전기통신연구소 측 유완영 교환연구부장(LG정보통신 전무, 오리온전기 사장 역임)과 박항구 실장이 체신부에 제출한 개발비는 290억원이었다. 같은 전화교환기 개발인데도 양측 간 개발비는 배가량 차이가 났다.

박 실장의 증언.

“당시 외국에서는 2억달러 이상 개발비가 들어갔어요. 그런데 우리는 근거 자료가 없었습니다. 최대한 개발비를 산정해보니 처음에 360억원이 나왔어요. 이를 체신부에 제출했더니 `터무니없이 너무 많은 금액`이라고 반려해 다시 산정한 금액이 290억원이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근거자료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최대한 금액을 늘린 것입니다.”

이렇게 제출한 개발비는 체신부 기술정책관실에서 최종 조정했다.

당시 체신부 기술정책관실은 정도길 정책관(전기통신시험소장, 정보통신훈련센터 이사장 역임)과 김영재 과장(한국통신 기술기획실장 역임)이 업무라인이었다.

서울공대를 나온 정 정책관도 이 분야는 생소해 정확한 액수를 산정할 수 없었다. 고심 끝에 두 곳에서 제출받은 개발비를 합해 이를 둘로 나누었다. 금액은 200억원 정도였다. 이에 40억원을 보태 240억원으로 결정했다는 게 당시 관계자 B씨의 증언이다. 물론 이와 다른 주장도 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뒷이야기 하나.

한국전기통신연구소에서 산정한 연구개발비는 지휘계통을 거치지 않고 비선라인을 통해 체신부에 제출됐다. 통신연구소 고위관계자는 체신부를 통해 연구개발비 산정 내역을 알게 됐다. 국가명운이 달린 중대사를 지휘계통을 거치지 않고 체신부와 직거래하는 식으로 진행되자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 A씨의 증언.

“어느 날 고위관계자가 교환기 연구 관련자 세 명을 인근 중국집으로 불렀어요. 술을 마시다가 그 자리에서 당사자들을 얼마나 매섭게 질책했는지 B박사가 졸도할 정도였습니다. 계통을 거치지 않고 그런 일을 했으니 상사 입장에서는 화가 날만도 하지요. 그 당시는 업무가 체계적으로 진행되지 않았어요.”

해가 바뀐 1982년 2월 5일.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최광수 체신부 장관으로부터 새해 업무계획을 보고받았다. 최 장관은 이 자리에서 “정부가 역점을 두는 전자산업육성을 위해 올해 240억원을 들여오는 1986년까지 전자교환기를 전면 국산화할 계획”이라며 “올해 25억원을 투입하고 통신시설 현대화와 기술개발을 위해 전자교환기 등 통신기기의 민간개발을 자유화할 방침”이라고 보고했다. 통신혁명의 도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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