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29일. 구본무 LG회장이 경기도 파주 LG화학의 LCD 유리기판 공장을 찾았다. 강유식 LG 부회장, 김반석 LG화학 부회장, 조준호 LG 사장 등 그룹 최고 경영진과 함께 였다. 구 회장은 생산 라인을 꼼꼼히 살피며 “양산 준비에 만전을 기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구 회장을 포함한 LG 경영진들의 공장 방문은 의미가 남달랐다. 현장 격려를 넘어 미래 성장 동력 확보에 대한 강한 의지가 담겼기 때문이다. 유리기판은 LCD 패널을 만들 때 박막회로가 증착되는 얇은 유리판이다. 뛰어난 내열성, 내화학성, 고도의 표면 품질이 요구돼 기술 장벽이 높다. 세계 시장 수요가 연 17조원에 이르지만 삼성코닝정밀소재·코닝·아사히글라스·일본전기초자(NEG) 4개 기업이 과점하고 있다. 공급자가 워낙 적다보니 LCD 패널 업체는 불황에 허덕여도 유리기판 제조사는 기록적인 영업이익을 남긴다. LG의 유리기판 도전은 바로 이 점에서 출발했다. 갈수록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선 핵심 소재 의존에서 벗어나야 했다. LG디스플레이가 한해 유리기판 구매에 쓰는 돈만 2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존도 높은 소재·부품=LCD 유리기판의 사례는 우리나라 디스플레이 산업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이 세계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디스플레이 최강국으로 부상했지만 소재·부품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가 PDP·LCD·OLED 디스플레이의 핵심 소재·부품을 조사한 결과 전체 국산화율 평균이 66%(2010년 기준)에 불과했다.
기술별로 살피면 PDP가 58%로 해외에서 가장 많은 소재 및 부품들을 들여와 적용 중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LCD는 66%, OLED는 87%로 조사됐다.
국산화율보다 더 큰 문제는 핵심 소재·부품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라는 데 있다. 액정, 편광판 재료인 TAC 필름과 PVA 필름, PDP·OLED 유리기판의 국산화율은 0%다. 전량을 해외에 의존한다는 뜻이다.
이들 소재·부품은 디스플레이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다. LCD는 전압을 액정에 전달함으로써 화상을 만들어낸다. 또 유리기판은 동작 회로를 구현하는데 필수다. 완제품 판매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핵심 소재·부품 때문에 해외 기업만 배불리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OLED는 괜찮을까=디스플레이 시장은 큰 전환점에 있다. 국내 기업들이 세계 우위를 차지하는 PDP·LCD는 성숙 단계로 진입하면서 레드오션 조짐을 보이는 반면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능동형 유기발광다이오드(AM OLED)가 부상 중이다. 한국은 세계 처음 AM OLED 시장을 개척한 만큼 일단 외견상 준비된 모습이다. LCD 산업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에서다.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에 따르면 AM OLED용 핵심 부품소재 국산화율은 87%다. 드라이버IC 국산화는 100%에 달했고 주요 재료인 발광층(EML)은 91%, 정공주입층(HIL)·정공수송층(HTL)·전자수송층(ETL)은 85%를 기록했다. LCD와 달리 삼성과 LG 등 국내 기업들이 장기간 국내 소재 기업들과 한발 앞선 협력을 통해 개발을 추진한 성과물이다.
하지만 원천 기술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표적인 예가 OLED 소재인 인광 재료다. 인광 재료는 기존 형광 재료보다 발광 효율이 네 배 이상 높은데다 수명도 길다. 인광 재료는 현재 미국 UDC가 독보적인 기술 장벽을 쌓아 놓았다. 특허 기간이 2020년까지다. 삼성도 이 회사에 1~2% 로열티를 지급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권장혁 경희대 교수(정보디스플레이학과)는 “인광을 쓰는 자체가 UDC 특허로 보면 된다”며 “저가의 OLED 재료들은 국산화를 다수 이뤘지만 핵심적인 고급 재료들은 아직도 해외에 의존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허약한 체력, 인수합병 노출=그나마 경쟁력을 갖춘 우리 기업이 외국계 자금에 노출되고 있다는 점도 위협 요인이다.
실제 일본 호도가야화학공업은 지난 2010년 국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소재 업체인 SFC 지분 약 30%를 매입한 뒤 2011년에는 64%까지 지분을 늘려 자회사로 편입시켰다.
이에 앞선 지난 2008년에는 국내 그라쎌디스플레이가 다국적 전자재료 업체인 롬앤하스에 매각됐다. 롬앤하스는 이듬해 또 다시 다우케미칼에 지분을 넘기면서 현재 그라쎌은 다우케미칼의 자회사가 됐다. 그라쎌은 지난 2000년 설립된뒤 뛰어난 OLED 소재 기술력을 축적했지만 장기적인 투자에 어려움을 겪어 결국 매각이 추진된 사례다.
외국계 기업들의 국내 OLED 소재 기업 인수는 신성장 동력 확보 외에도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한국 AM OLED 패널 업체를 단숨에 고객사로 끌어들이기 위함이다. OLED 시장이 성장할수록 국내 기업들을 향한 인수합병 시도는 더욱 늘어날 것이 확실시 된다. 지금도 몇몇 기업 사이에는 깊이 있는 인수합병 논의가 이뤄지는 상황이다.
◇“장기적 육성 필요”=이에 따라 국가 산업 관점에서라도 핵심 기술 확보와 경쟁력 있는 기업 육성에 심혈을 기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정노 전자부품연구원 센터장은 “부품소재 사업은 장기간 투자에도 결실을 맺기 어려운 분야인 데 어렵게 경쟁력을 갖춰도 대부분 경영 기반이 취약하다보니 해외 기업 또는 펀드에 경영권이 넘어가는 경우가 심화되고 있다”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MP3특허 기술을 확보하고도 사업화 과정에서 분쟁 및 비용 문제로 특허권을 뺏겨 오히려 현재 해외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는 사례를 들며 “경쟁력 있는 기술이 꽃이 필 때까지 지원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원천 기술 확보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도 지적된다.
액정 시장 강자 머크가 액정 연구에 착수한 건 백년이 훨씬 넘은 지난 1904년이었다. 그로부터 약 70년이 지나서야 액정은 디스플레이용 소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머크는 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어디에 쓰게 될지도 모르는 액정 연구를 위해 매년 연구비를 지출했다.
권장혁 경희대 교수는 “차세대 디스플레이 양산 기술도 중요하지만 핵심 원천 기술 확보를 위한 투자에 기업과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