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정의 어울통신]블랙리스트 제도의 역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당초 휴대폰 유통시장의 빅뱅을 예고했던 `블랙리스트 제도(단말자급제)`가 시행된 지 보름이 지나가지만 현실은 좀체 변화의 싹이 보이지 않고 있다.

블랙리스트 제도가 무엇인가. 휴대폰을 구입할 때 이동통신사를 거치지 않고 단말기만 구입한 후 이통사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쉽게 말해 이통사의 대리점 이외에도 제조사 직영점, 대형마트, 편의점, 인터넷쇼핑몰 등 다양한 유통망에서 소비자가 자유롭게 단말기를 구입할 수 있다. 선진국 다수가 채택하고 있고 제도 자체의 장점도 많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것처럼 제도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예컨대 유통업체 간 단말기 판매 경쟁으로 단말기 가격 인하 효과가 기대된다. 천문학적 보조금과 마케팅 경쟁이 잦아들면 통신비 인하 효과로 이어질 수 있고 인프라 투자도 늘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독점적 유통 카르텔 때문일 것이다. 준비 부족 탓도 있다. 지난해부터 정부는 블랙리스트 제도를 실시하겠다고 공언해 왔지만 막상 단말기, 요금제, 유통망 등 시장의 준비 상황을 제대로 점검하지 못했다.

먼저, 자급제용 휴대폰 판매 유통업체가 많지 않다. 우리나라 휴대폰 시장은 이동통신사와 삼성·LG 등 몇몇 제조사가 장악했다. 블랙리스트 제도가 파고들 여지가 많지 않다는 얘기다. 이마트 등 대형 유통망을 갖춘 업체가 나선다고 해도 화웨이·ZTE 등 저가의 해외 단말기 제조사가 들어와야 하는데 사후서비스(AS) 체계 구축이 쉽지 않다.

현 유통체계로는 특히 일선 판매점이 가입자 유치수수료 수입을 거부하기 어렵다. 소비자 역시 가입비와 유심비, 채권보증료 등을 감면받을 수 있다. 롱텀에벌루션(LTE)폰은 가입 시 현금까지 제공하는 공세를 펴고 있다. 전자결제 등 금융서비스 차별도 존재한다.

요금제 자체의 맹점도 있다. 소비자는 기존 이통사의 약정할인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 휴대폰을 구입해왔다. 막대한 보조금 공세가 여기서 시작된다. 하지만 직접 빈 단말기를 구입하면 약정할인을 받을 수 없어 오히려 실부담이 가중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요금제도 다양하게 마련돼 있지 않다. 유럽과 미국은 선불제와 후불제, 정액제와 종량제, 음성과 데이터 등 다양한 옵션 프로그램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반면에 통신사 전용 단말기는 사전에 탑재되는 서비스가 매력이다.

현재로서는 소비자, 서비스사업자, 제조사, 판매점 모두 만족스럽지 않다. 장롱폰이나 중고폰, 빈 단말기를 통신사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점 이외의 특별한 장점이 없다는 얘기다. 휴대폰 유통시장에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유다.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진입장벽이 높고 기득권이 강한 통신서비스 시장의 특성상 당장 새로운 제도가 쉽게 뿌리내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정책의 방향성이 맞다면 하나하나 상황을 점검하고 개선점을 찾아나가서 변화의 싹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규제 산업의 특성이기 때문일까. 정부의 역할론에 다시 시선이 모인다. 제도 자체의 취지가 분명하고 장점이 많은데도 시장에서 통하지 않는다면 접근법이나 방법론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책 방향이 맞다면 어떤 비판에 직면하더라도 선택은 한 가지뿐이라는 점이다. 바로 정면돌파다.


박승정 정보사회총괄 부국장 sjpark@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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