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도 아니고~ 대중문화 '탄압' 언제까지

[게임은 문화다]<8>문화 탄압, 그 유구한 역사

근대 이후 대중문화에 대한 핍박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많은 이들이 즐기는 대중문화의 파급력은 실로 커 놀이나 취미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소수 권력층이 대중 혹은 시민의 결합된 힘을 견제하는 상황은 근대 들어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됐다. 대동놀이에서 게임까지 규제 방법과 명분 또한 시대에 따라 진화해 왔다. 그 뿌리에는 대부분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에 대한 누군가의 `알레르기 반응`이 있다. 셧다운제 등 최근 불거진 게임 논의는 대중문화 억압이라는, 오랜 수명을 이어온 생명체의 현재 모습이다. 규제라는 이름의 이 생명체는 게임 이전에도 많은 문화를 삼켜왔다.

◇1900년대 초·중반 권력 유지를 위한 문화 탄압=일본 제국주의 망령이 한반도에 스며든 1900년대 초반에는 속칭 대동놀이로 불리는 전통문화가 된서리를 맞았다.

일제는 굿을 비롯해 남사당패, 지신밟기, 줄다리기, 동채싸움(차전놀이) 등 공공장소에서 여럿이 모여서 하는 거의 모든 놀이를 금지했다. 구한말 정세를 기록한 `매천야록`에 따르면 일제는 대동놀이를 막기 위해 군대 등 무력까지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고 한국의 전통 향수를 자극할 소지가 있는 대동놀이는 체제에의 위협으로 간주했다.

해방 이후 들어선 정부에서도 대중문화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독재타도` 구호가 끊이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끈 정권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등 문화 탄압에 나섰다.

대통령의 권세를 풍자한 시사만화가가 재판에 회부되는가 하면(1958년 김성만 화백, 일명 경무대 똥통사건) 시사풍자 프로그램을 방송한 방송사 관계자가 다음날 경찰에 연행되는 일(1964년 동아방송, 일명 앵무새 사건)도 있었다.

이 시절 탄압은 대부분 권력에 대한 표현을 억제하거나 언로를 틀어막음으로써 사회 분위기를 위축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경제성장으로 1970년대 라디오, TV 등이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하며, 권력의 심장부는 매스미디어의 통제 필요성을 절감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기타리스트 신중현은 2006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1972년 청와대로부터 대통령 찬가를 만들라고 강요받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1980, 1990년대 들어와 대중문화를 향한 경계의 눈빛은 표면적으로 다소 느슨해진 듯 보였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이 시기 주된 규제의 대상은 영화와 음악이었다. 특히 영화는 `검열`이 일상화돼 있었다.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크래쉬`가 선정성을 이유로 10분 이상 잘려나간 채 상영됐다는 사실은 한국의 문화 규제 경직성이 최근까지도 이어져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높아진 인식을 무기로 한 대중문화 진영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사전 검열을 일삼던 공연윤리위원회가 1996년 헌법재판소의 영화법 위헌 결정이 내려진 후 해체되고 대신 등급을 매기는 영상물등급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만화와 게임. 청소년으로 타깃 이동한 억압=음악, 영상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억압은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서서히 해빙기를 맞았다.

짧은 시간에 이룬 경제성장과 풍요로 인한 인식 변화는 과거의 억압이 그대로 유지되기 힘든 토양을 만들었다. 즐길거리에 대한 사회적 욕망이 누를 수 없을 정도로 팽창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대중문화 규제에 대한 딱딱한 사고방식이 서서히 풀리며 억압의 초점은 청소년에게 집중된다. 성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으로 미성숙한(혹은 그렇다고 판단되는) 청소년은 통제 대상으로 남겨졌다. 각종 매체가 `청소년 유해물`이란 딱지를 붙인 채 오물을 뒤집어써야 했다.

직격탄은 우선 만화에 떨어졌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 시장을 벤치마킹해 생겨난 청소년 만화잡지들은 1997년 제정된 `청소년보호법`을 기점으로 급격히 쇠락했다. 많은 창작자와 서점주인, 출판사 등 사업자들이 `불붙은 다이너마이트` 같은 성인물 만화를 취급을 꺼렸다. 수많은 만화들이 폭력성과 선정성을 이유로 19세 미만 판정을 받은 채 사라져갔고 산업은 쇠락했다.

청소년보호법은 이후 강력한 제제수단으로 작용한다. 이 법은 만화를 비롯해 공연, 도서, 영화, 드라마 등 거의 모든 대중문화 전반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덩치를 키워나갔다.

2000년대 들어 매체의 중심이 인터넷으로 옮겨오며 청보법 역시 디지털 콘텐츠에서 새로운 `살길`을 찾기 시작한다. 2011년 결국 이 법은 청소년이 심야 온라인 게임 이용을 제한한다는 명분으로 셧다운제를 품었다.

대중문화에의 억압과 규제는 시대에 따라 때로는 권력 유지 도구로 때로는 사회 구성원들을 가르는 울타리로 그 모습을 바꾸며 영향력을 이어왔다. 규제라는 `생명체`가 긍정적 효과를 가져왔다 해도 다양성이라는 대중문화 제1의 미덕을 꾸준히 파괴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최관호 한국게임산업협회장은 최근 게임규제 일련의 사태에 “게임 등이 새로운 미디어로 대두되면서 세대 간 충돌하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가 문화적 다양성에 인색하다”고 지적했다.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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