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국내 통신·네트워크 장비 업체에게 `잔인한 계절`이다. 연간 유지보수비용(OPEX) 요율 책정을 위해 통신사와 줄다리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계약상으로는 12월 협상이 완료돼야 하지만, OPEX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통신사 정책에 이듬해 3~4월까지 계약이 미뤄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올해는 특히 수익 악화를 이유로 통신사들이 긴축재정에 들어감에 따라 협상은 더욱 난항을 겪을 전망이다. 네트워크 업체 한 임원은 “작년 0.8% 정도 책정된 요율을 올해 높이려 하지만 통신사가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하고 있다”며 “요율이 깎이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OPEX 요율을 놓고 통신사와 장비업계가 벌이는 씨름에서 키를 쥔 쪽은 KT다. KT는 2009년 이석채 회장 취임 이후 국내 업체에게 정식으로 OPEX를 지급하는 등 유지보수 비용 현실화에 물꼬를 텄다.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도 매년 KT 기준에 맞춰 요율을 책정하고 있다.
2009년 당시 통신사와 국내 장비업계는 글로벌 수준에 맞춰 궁극적으로 3% 요율을 적용한다는데 공감했지만 현재까지 1%를 넘지 못하고 있다.
OPEX 요율이 나아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통신사 철학 부재 때문이다. 매년 다른 부문 예산을 책정하고 남는 범위에서 요율을 맞추다 보니 개선은커녕 1% 이하에서 수치가 오르내리는 현상이 반복된다는 지적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정부 간담회 때마다 장비 OPEX 현실화 건의가 나오지만 의견 전달에만 그친다.
업계는 OPEX 요율을 1.5%까지 올려야 그나마 현실적인 수준을 맞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요율을 2배 가까이 늘려도 통신사에게는 큰 부담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국내 통신사가 매년 장비 유지보수 비용으로 지출하는 금액은 300~400억원대로 추정된다. 조 단위 매출을 올리는 기업 입장에서 미미한 수준이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OPEX 개선은 숫자 문제가 아니다”라며 “각 기업 CEO들이 개선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단칼에 해결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해 이석채 KT 회장이 “소프트웨어(SW) 유지보수 비용을 글로벌 수준에 맞추겠다”고 공언한 뒤 개선이 이뤄졌다.
자체 유지보수 인력을 가진 KT에 비해 SK텔레콤과 LG유플러스는 더 높은 요율을 책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조직상 6000여명 유지보수 인력을 가진 KT와 그만한 조직을 보 유하지 못한 다른 통신사는 기준이 달라야 한다는 이야기다.
장비 업계는 OPEX 요율 현실화가 결국 건전한 통신 생태계 마련을 위한 초석이라고 강조한다.
국내 통신 인프라 수급권을 쥔 통신사들이 공급 업체들과 제대로 된 거래를 하지 않는 이상 `가격 후려치기` `불공정거래` 등이 만연해 결국 통신 경쟁력 저하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웃 일본만 하더라도 한국 업체에게 제대로 된 유지보수 비용을 지급하고 있다”며 “국내 통신사는 생태계 우위를 무기로 오히려 글로벌 회사에 비해 토종 업체에게 요율을 박하게 책정하는 등 제 식구를 쥐어짜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또 다른 관계자 역시 “통신품질 마케팅 경쟁의 일부만 공급업체를 위해 돌려도 침체된 장비 업체에 숨통이 트일 것”이라며 “선순환 관점에서 통신사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시소기자 sis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