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78>

 박성득 차관

 

 “흰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달리는 기분 상쾌도 하다/종이 울려서 장단 맞추니…”

 크리스마스 캐롤이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성탄절 하루 전인 1996년 12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은 정보통신부를 비롯한 차관급 인사 18명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정보통신부 차관에는 박성득 기획관리실장(현 한국해킹보안협회 회장)이 임명됐다. 이계철 차관(현 KT사우회장)은 한국통신(현 KT) 사장으로 발령 났다.

 박성득 차관의 발탁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그의 차관 발탁은 기술고시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과거 체신부 관료로 처음 윤동윤 장관(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이 체신부 장관에 발탁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인사였다. 그동안 행정고시 출신이 독식해 온 차관인사 관행에 일대 변화를 예고하는 일이었다. 기술력이 국가경쟁력 잣대가 되는 정보화시대에 기술고시 출신 차관 발탁은 당연했지만 그때까지는 그런 일이 전무했다.

 차관인사와 관련한 강봉균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재경부 장관 역임, 현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의 증언.

 “청와대에 차관으로 박성득 실장을 단수(單數)로 추천했습니다. 장관이 외부에서 온 것 인 만큼 차관은 내부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부내 요직을 두루 거쳐 모든 업무에 정통하고 상하 간 신망이 두터운 박 실장이 최적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체신부 시절부터 각종 정보통신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해온 핵심 인물입니다.”

 박 실장이 차관 임명 사실을 통보받은 것은 24일 아침 출근직후였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예 박성득 실장입니다.”

 “오늘 오후에 차관 임명장 수여식이 있습니다. 제 시간에 청와대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신의 차관 발탁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그는 차관 인사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퇴임을 전제로 책상 정리를 해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급 자리만 5년이나 재임했다. 체신부 통신정책실장으로 3년, 정보통신부 기획관리실장 2년 등이었다. 흔치 않은 기록이었다.

 박성득 차관의 말.

 “5년이나 1급으로 일했으니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책상을 정리해 놓고 있었어요. 차관 인사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니 평상시 차림으로 출근했습니다.”

 당장 옷차림에 문제가 생겼다. 그가 출근하면서 메고 나온 넥타이는 낡고 색상이 칙칙했다. 그런 차림으로 청와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아랫사람 넥타이를 빌려 멨다. 남색바탕에 꽃무늬가 있는 넥타이이었다. 그는 빌린 넥타이를 매고 청와대 임명장 수여식에 참석했다. 이 일은 두고두고 내부의 이야기꺼리가 됐다.

 박 차관은 오후 2시 청와대 본관2층 회의실에서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았다.

 박성득 차관의 기억.

 “김영삼 대통령이 임명장을 주면서 ‘박 차관이 기술고시 최초의 차관’이라며 ‘정보통신강국 구현에 최선을 다해 달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시더군요.”

 김 대통령은 임명장을 준 후 차관들에게 “우리 경제의 폐단인 고비용, 저효율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분야에서 국가경쟁력을 10% 이상 높이자”며 “각 부처에서 국가경쟁력 제고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윤여준 청와대 대변인(환경부 장관 역임, 현 재경일보 회장)은 “이번 차관급 인사는 업무의 전문성과 추진력, 청렴성 등을 감안했으며 일부 부처는 조직내부에서 발탁했다”고 인사배경을 설명했다. 그 일부 부처가 정보통신부였다.

 박 차관은 청와대 일정을 끝내고 청사로 돌아와 오후 5시 대회의실에서 취임식을 갖고 업무를 시작했다.

 박 차관은 취임식에서 “국가경쟁력 강화는 정보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돼 정통부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확대되고 있다”면서 “그동안 정통부가 마련한 각종 정책을 차질 없이 추진해 정보통신산업이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모두 최선을 다하자”고 말했다.

 정통부는 12월 30일 공석인 기획관리실장에 이성해 정보통신지원국장(현 큐앤에스 회장)을 승진 발령했다. 이 실장은 MBC 정치부 차장 출신으로 체신부 공보관과 부산체신청장, 전파관리국장으로 일했다. 통신지원국장에는 서영길 국제협력관(TU미디어 대표 역임, 현 IGM세계경영연구원장)이, 국제협력관에는 이교용 국장(우정사업본부장 역임, 현 한국우취연합회장)이 전보됐다.

 박성득 차관. 그는 기술계의 대부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학비 전액을 국비로 지원해 전국의 가난한 집안 수재들이 다 몰린다는 체신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체신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와 한양대학교 산업대학원을 졸업했다. 기술고시 5회로 체신부와 정보통신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작은 키에 호방한 성격이어서 별명은 ‘작은 거인’. 중국의 등소평과 비유해 ‘박소평’으로 불렸다. 그의 공직생활은 한국정보통신산업 발달사와 흐름을 같이 했다.

 서울 영등포 전화국기술과장을 거쳐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통신지원반 근무에 이어 체신부중앙전파감시소장, 통신정책국장, 전파관리국장, 체신부 초대 통신정책실장, 정통부 기획관리실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그는 청와대 통신망 구축에 핵심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의 지방 순시에도 경호실팀과 같이 동행했다. 정부안에서 그의 통신기술에 대한 형안(炯眼)을 뛰어넘을 사람은 없었다.

 그는 업무에 관해 치밀했고 담대했다. 그가 체신부 통신정책국장 시절 초대 한미통신회담 수석대표로 미국과 국익을 놓고 다퉜던 일은 지금도 널리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다. 한미통신회담에서 정부 훈령을 어기고 미국 측에 회담 결렬을 선언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당시 한미관계는 미국 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일방통행식이었다.

 미국 측은 슈퍼 301조를 앞세워 통신시장 개방과 관세 철폐, 투자제한 철폐 등을 요구했다. 이때 그는 미국 측에 대해 “이런 식이면 협상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며 회담 결렬을 선언하고 귀국했다. 그는 국가를 위해 회담 결렬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사직서를 써 품안에 넣고 장관실로 올라갔다.

 하지만 통이 큰 최영철 당시 체신부 장관(국회부의장, 통일부총리 역임, 현 서경대학교 총장)은 오히려 그에게 “수고했다”며 한마디 질책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박 국장의 국익가치와 협상원칙에 공감했던 것이다.

 최영철 전 장관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가 사전 대비도 없이 통신시장을 개방할 수는 없었어요. 회담이란 주고받는 것인데 우리가 협상을 깨야 미국 측도 긴장하는 법입니다. 오히려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 장관은 박 단장에게 통신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를 그에게 맡겨 미국과 통신시장 개방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만들도록 지원했다.

 박 차관은 체신부 정보통신정책실장 시절,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계획 입안을 총괄했다. 이어 제2이동통신심사평가단장을 맡아 원칙대로 신규 사업자를 선정했다. 그러나 이 일은 신규사업자로 선정된 대한텔레콤이 노태우 대통령 사돈기업인 선경그룹이 대주주라는 점 때문에 특혜시비에 휘말리면서 정치쟁점화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선경그룹이 사업권을 자진 반납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형식은 선경의 자신반납이었지만 실제는 청와대 압력이었다.

 노태우 전대통령은 2011년 8월에 출간한 ‘노태우 회고록’에서 “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청와대나 내가 개입한 일은 절대 없었다”고 밝혔다. 노 전대통령은 “나는 ‘송언종 체신부 장관에게 만에 하나 청문회가 열리게 되더라도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엄정하게 추진하라’고 당부했다”며 개입사실을 강력히 부인했다.

 노 전대통령의 회고록 증언.

 “송언종 장관은 거짓말을 하거나 남의 눈치를 살필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소신껏 자신의 생각을 성실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와 선경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해 결국에는 선경이 사업권을 반납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다음 정권(YS)에 가서 결국 선경이 이동통신을 인수한 것을 보면 다른 업체들보다 실력이 월등한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지금까지 제2이동통신 선정과 관련해 이런 저런 말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재임시절 사업자 선정을 미루자는 의견이 일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최각규 부총리(강원도지사 역임)를 중심으로 경제관계 장관들이 회의를 한 일이 있었다. 나중에 보고를 받아보니 사업자 선정을 미루자는 의견이 제기됐다. 이원조 민자당 의원(작고)도 ‘지금 사업자를 선정하면 안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보고를 받고 ‘그게 무슨 소리냐. 경제문제를 다루면서 왜 정치논리를 개입시키느냐. 사업자가 누가 될지는 심사해 봐야 아는 일이다.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사업이니 소신을 갖고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다만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송 장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청와대는 일절 관여하지 말라는 원칙을 정해 주었다.”

 이 사건은 정책이 정치에 휘말린 대표적인 사례였다.

 박 차관은 정통부 기획관리실장 시절, 폭넓은 대인관계를 바탕으로 정보화기획실 설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총무처 조직국장실에서 살다시피하면서 기획실 설치를 성사시킨 뚝심의 소유자였다.

 새해를 맞은 1997년 1월3일 정보통신부 22층 대회의실.

 강봉균 장관은 신년사를 통해 “올해 정보통신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국가사회 전반의 정보화를 촉진시켜 나가고 정보통신산업을 미래산업으로 국가전략적 차원에서 적극 육성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정보통신부는 그해 1월 20일 1997년에 추진할 주요 업무계획을 발표했다.

 정통부가 발표한 내용은 크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보화 추진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촉진 △정보통신산업 전략적 육성 △통신사업경쟁 확대 및 공정경쟁체제 구축 △방송 및 위성사업의 활성화 △전파이용 환경 선진화 △우정사업 경영개선과 서비스 질 향상 △국제협력 활동 강화 등이었다.

 모든 성공은 계획과 철저한 준비의 결과였다. 정보통신강국이라는 대원(大願)을 세운 정통부의 새해는 희망에 넘쳐 있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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