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이광형 KAIST 교수가 운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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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출연연구기관이 거버넌스(지배구조) 논의 3년 만에 새 틀을 갖추게 됐다. 융·복합 연구와 효율성 제고가 거버넌스 개편 배경이다. 출연연 20여곳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산하 단일법인으로 헤쳐 모인다. 5개는 부서직할로 남고, 1개는 민영화한다.

 출연연 역사를 되돌아보자. 초기를 제외하고는 3~5년마다 변화가 일어났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스템을 입맛대로 바꾼 셈이다. 우리나라 최초 출연연은 지난 1966년 설립한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다. 1970년대 특정연구기관육성법에 따라 기계, 화학, 전자, 선박, 표준, 에너지, 원자력 등 전문분야 출연연이 설립됐다. 외국서 도입한 기술을 소화하고 개량, 토착화하는 일이 미션이었다. 기업에 연구역량 자체가 없던 시절이다. 당시엔 연구원 대우도 좋았다. 해외유치 과학자 연봉은 대기업 직원 부럽지 않았다. 자긍심도 대단했다.

 채영복 전 과기부 장관이 연구회 이사장 시절 늘 하던 말이 있다. “KIST 근무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 찾아 금일봉을 주고 가셨는데, 그 돈을 모아 땅도 사고, 건물도 지었다.” 그만큼 대우도 좋았고, 경제적으로 먹고 살 걱정이 없었다.

 출연연은 제5공화국이 들어선 1980년 강제 통폐합됐다. 16개 출연연을 9개로 합치고, 과학기술처 산하로 일원화했다. 많은 연구원들이 상처받고 떠났다. 이때부터 출연연 위상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0년대엔 기업 연구능력이 어느 정도 갖춰지면서 공공복지나 거대복합기술, 목적기초 연구가 출연연 미션이 됐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PBS(연구과제중심제도)는 1996년 도입됐다. PBS는 프로젝트 중심으로 연구기관을 운영 관리하는 것이다. 이 시스템 도입으로 이른바 보따리 연구, 수주경쟁이 본격화했다. 출연연 무한 경쟁시대라고 일컫는다. 연구원 이탈도 늘었다.

 정권이 바뀌자 출연연에 다시 변화가 찾아왔다. 1999년 연구회 체제로 개편했다. 국무조정실 아래 3개 연구회가 만들어졌다. 2004년엔 과학기술부총리 체제가 들어서며 연구회 산하 22개 출연연이 과학기술부로 모두 이관했다.

 2008년엔 교육과학기술부로 정부직제가 개편되면서 3개 연구회는 2개로 줄었다. 산업기술연구회는 지식경제부 산하, 기초기술연구회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로 이관됐다.

 지난 5월 ‘행복한 과학기술’을 주제로 다룬 포럼장에서 연사로 나선 이광형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연구비 유용시비에 휘말려 세상을 떠난 동료교수에 대한 눈물이었다.

 시스템이 바뀌어도 연구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손오공 머리띠 ‘금강권’이 오공을 제약하듯 연구비나 시스템, 나아가 과학기술 틀이 더 이상 과학기술자의 창의적 연구를 옭아매는 수단이 돼선 안 된다. 세계적인 연구결과를 바란다면 더더욱 그렇다. 노벨상은 체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머리’에서 만들어진다.


 박희범 전국취재팀 부장 hb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