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봉균 정통부 장관
1996년 8월 8일 목요일.
청와대 비서실은 아침부터 급박하게 돌아갔다. 김영삼 대통령은 휴가 중인 이수성 국무총리(새마을중앙회장 역임, 현 통일을 위한 복지기금재단 이사장)를 예고 없이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함께했다. 관가(官街)에 개각설이 안개처럼 퍼졌다.
오후 1시경 김 대통령은 윤여준 청와대 대변인(환경부 장관, 국회의원 역임, 현 재경일보 회장)을 집무실로 불러 개각 명단을 넘겨주었다.
윤 대변인은 1시반경 청와대 기자실로 내려와 “김 대통령은 오늘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에 한승수 전 대통령 비서실장(국무총리 역임, 현 김앤장 고문)을 임명하는 등 6개 부처 개각을 단행했다”고 발표했다.
김 대통령은 정보통신부 장관에 강봉균 국무총리행정조정실장(재경부 장관 역임, 현 민주당 국회의원)을, 과학기술처 장관에 구본영 청와대 경제수석(작고), 청와대 경제수석에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현 KT 회장)을 각각 임명했다.
개각이 발표되자 휴가 중이던 이석채 정통부 장관은 이날 오후 4시경 급히 정통부로 나와 5시에 이임식을 갖고 정통부를 떠났다.
이석채 장관의 회고.
“당시 저의 경제수석 임명에 청와대 안에서 반대 기류가 있었어요. 제가 경제수석이 되면 소신파인데다 직설적인 성격으로 수석 간에 갈등을 빚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는 것입니다.”
강봉균 장관은 언제 누구로부터 내정을 통보받았는가.
강봉균 장관의 회고.
“이수성 국무총리가 그날 청와대 오찬이 끝난 후 돌아와서 제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축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 장관이 처음 통보받는 자리는 정통부가 아닌 과학기술처 장관이었다. 그런데 청와대 발표를 보니 정통부 장관이었다. 인사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이다. 차관 자리만 세 번을 거쳐 입각 영순위인 그를 서열이 낮은 과기처 장관에 임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청와대 비서실 의견이 반영돼 막판에 바뀌었다는 것이다.
정통부 수장(首長)이 된 강봉균 장관은 누구인가. 그는 고난을 딛고 성공한 엘리트 경제관료다. 그는 지역차별이 상존하던 영남 출신 대통령 정부에서 최고의 기획통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3, 4, 5, 6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주도했다. 그는 일에 관해 똑소리가 났다.
강 장관은 가난한 시골 집안에서 태어나 군산사범학교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뒤늦게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했다.
강봉균 장관의 말.
“5·16군사정변이 나던 해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어요. 혁명공약에 국민의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게 들어있었습니다. 저는 경제를 공부해 국가빈곤을 타파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2000년에 펴낸 그의 자서전 ‘초등학교 교사에서 재경부 장관까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그 무렵 나는 재건국민운동 청년회와 부녀회 지도교사로 활동하면서 농촌 근대화 현장에 있었다. 박 대통령이 초등학교 교사 3년 만에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도 대학 진학 결심을 굳혔고, 마침내 독학으로 1964년 서울상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해인 1969년 행정고시 6회에 합격,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강 장관은 사무관 시절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립’에 참여해 기획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후 4차, 5차, 6차 등 네 번이나 경제개발계획 입안을 주도했다. 그는 경제개발계획의 산증인이었다. 개발시대 ‘최고의 보직’이라는 경제기획국장을 두 번씩이나 맡았다.
경제기획원에서는 강 장관과 이석채 청와대 경제수석(현 KT 회장),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15대 국회의원, 기술보증기금 이사장 역임, 현 한국디지털미디어고 교장) 등을 경제기획원 트로이카로 불렀다.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5년부터 4년간 경제기획국장으로 장수하면서 10% 이상 고성장과 3%수준 물가안정, 국제수지 흑자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는 데 기여했다. 그가 모신 경제부총리만 해도 신병헌, 김만제, 정인용, 나웅배 씨 등 네 명이나 됐다.
경제부총리가 바뀔 때마다 경제기획국장 교체여부가 관심이었다. 하지만 네 명의 부총리는 강 국장은 바꾸지 않았다.
그는 1990년 4월 3일 두 번째 경제기획국장으로 발령났다. 노태우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걸었던 금융실명제 도입이 철회되면서 한이헌 국장이 물러난 후였다. 두 번째 경제기획국장 재임기간은 한 달도 안 됐다. 그해 5월 1일 경제기획원 차관보로 승진했다. 관례를 벗어난 파격적 승진인사였다. 그는 차관보로 4년간 일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김영삼 정부로 정권이 교체돼도 그는 차관보 자리를 지켰다. 이것도 기록이었다.
그는 한국경제 개발의 전도사로 개발도상국에 성공사례를 널리 전파했다.
강봉균 장관의 설명.
“당시 외교부를 통해 개발도상국에서 한국의 개발성공 요인을 배우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한국에 온 개도국 국회의원이나 관료들을 대상으로 두세 시간씩 성공사례를 소개했습니다. 1991년에는 중국 정부초청으로 중국에서 국장급 이상 관료들을 대상으로 이틀간 경제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오전에는 강의를 하고 오후에는 자유토론을 했는데 그 당시 국장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1992년에는 베트남에 가서 역시 경제교육을 했어요. 대단히 자랑스럽고 보람이 컸습니다.”
그는 원칙과 소신에 충실했다. 그의 강직함을 보여주는 사례 하나. 1980년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할 무렵, 각 부처에서 엘리트를 차출했다. 그는 차출 대상이었다. 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상상 못할 일이었다.
두 번째 사례. 차관보로 잘 나가던 그는 1993년 5월 23일 대외경제조정실장으로 밀려났다. 차관으로 승진해야 할 그로선 사실상 좌천이었다. 당시 실세였던 박재윤 청와대경제수석(통상산업부 장관, 부산대학교 총장 역임)과 정책충돌 때문이었다. 그는 박 수석과 호형호제하는 각별한 사이였다. 하지만 공적 소신은 사적 인연을 뛰어넘었다.
김영삼 정부시절 박 경제수석이 강 차관보에게 ‘신경제 5개년계획안’ 수립을 주문했다.
그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있는데 무슨 신경제계획인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작성지침을 만들어 청와대로 올라갔다. 국장급 비서관들이 보는 앞에서 박 수석과 강 차관보는 계획안을 놓고 격론을 벌었다. 그 핵심은 금융개혁이었다. 강 차관보는 “금융개혁 없이는 신경제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 경제수석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고 맞섰다. 강 차관보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충돌했다.
강봉균 장관의 증언.
“박 수석에게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켜라. 나는 못 하겠다’고 소리치고 문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한 달 동안 그 일을 안했어요.”
한 달여가 지난 어느 날 퇴근 무렵, 이경식 부총리(한국은행 총재 역임)가 강 차관보를 집무실로 불렀다.
“청와대와 상의했는데 강 차관보를 교체할 수밖에 없어요.”
그는 대외경제조정실장으로 발령이 났다. 청와대의 눈밖에 나면 그만둬야 했지만 그의 능력이 그를 지키게 한 것이다.
하지만 관운(官運)의 여신은 그에게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1993년 12월 1일 제네바에서 열린 우루과이라운드협상 실무대표단장으로 활동했다. 이 일이 전화위복이 됐다.
당시 쌀 개방 문제는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나 같았다. 김영삼 대통령이 후보시절이던 1992년 11월 23일 유세장에서 “쌀은 절대 개방하면 안 됩니다. 대통령직을 걸고, 쌀시장은 개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공약한 상태였다.
이 공약은 김영삼 정부의 족쇄가 됐다. 쌀시장 개방은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강 실장이 해결사로 총대를 멨다. 강 실장은 각계 전문가 20여명과 밤을 새워 토론하며 안을 만들었다. 강 실장은 11월 말 김영삼 대통령에게 이경식 경제부총리와 박재윤 경제수석 등이 배석한 가운데 쌀시장 개방 대책을 보고했다. 한국도 최소시장을 개방하고 개방기간을 최대한 유예하되 국민 수요의 1~4%를 수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김 대통령은 강 실장 보고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강 실장은 제네바로 날아가 실질적인 UR협상을 지휘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강 실장은 그해 12월 28일 노동부 차관으로 승진했다. 이어 1994년 10월 6일 경제기획원 차관에 임명됐다. 3개월여 만인 그해 12월 26일 다시 국무총리행정조정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차관 자리만 세 번째였다. 김 대통령은 그해 12월 23일 정부조직개편에서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해 재정경제원을 출범시켰다.
강봉균 장관의 회고.
“청와대 지시를 받아 두 부처를 통합하는 작업을 했어요. 작업이 순탄할 리 없었어요. 파란곡절을 겪으며 기구와 인력 등을 확정했어요. 출범하는 통합부처 차관은 제가 가는 걸로 청와대에서 언질을 줬고 그래서 실무 작업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사발령이 안 나요. ‘이상하다. 이거 무슨 일이 생겼구나’ 했어요. 12월 27일 청와대에서 차관인사 발표를 앞두고 세 시간동안 격론이 벌어졌다고 해요. 저의 차관 임명을 놓고 ‘찬성’과 ‘반대’가 팽팽히 맞섰는데 결론은 총리행조실장으로 보내기로 했다는 겁니다.”
정부는 행정조정실장 위상을 대폭 강화했다. 과거 행정조정실장은 차관회의 멤버가 아니었다. 그가 행정조정실장으로 가면서 차관회의 의장을 맡았다. 행정조정실장은 감투가 10개가 넘었다. 그는 정보화추진위원회 실무위원장으로 정보화촉진기본법과 정보화기획실설치, 정보화촉진기본계획 입안 과정에서 부처 간 이견을 조율하면서 정보화 기반을 구축하는 데 조정자 역할을 했다.
그는 행정조정실장 시절 집을 반포에서 총리공관과 가까운 청운동으로 옮겼다. 그는 아이디어가 넘쳐 ‘꾀주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번 맡은 일은 줄줄 꿰고 있어 ‘빠꼼이’로도 불렸다. 이수성 총리는 “강 실장 같은 공무원이 있는 줄 몰랐다”고 격찬했다.
그는 학구열이 강해 미국 월리엄스칼리지에서 경제학 석사를, 그리고 1989년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심 없이 소신껏 업무를 합리적으로 추진한 결과는 장관 발탁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