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가 8일 하원에서 치러진 2010년 예산 지출 승인안 표결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 사임의 벼랑 끝에 몰린 것이 유로존(유로화 사용국가) 채무위기 해결에는 오히려 호재로 해석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이날 오후(현지 시간) 실시된 하원의 표결에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자 런던과 프랑크푸르트, 파리 등 유럽 주요 증시는 일제히 상승세로 거래를 마쳤다.
이탈리아 밀라노 증시의 FTSE Mib 지수는 표결 전에 2.0% 이상 상승했다가 베를루스코니가 과반 확보 실패 이후에도 사임 여부를 즉각 결정하지 못하자 오히려 상승폭이 줄어들었다.
이탈리아 10년물 국채 수익률은 이날 아침 유로존 출범 이후 최고치인 6.74%로 치솟았다가 베를루스코니의 사임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에 따라 잠시 진정 기미를 보였고, 표결 후 즉각적인 사임 발표가 없자 6.76%로 다시 상승했다.
이탈리아 경제위기의 심각성을 더하는 주된 요인 중 하나가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라는 시장의 시각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국가 경제가 위기에 빠져들고 국채 수익률이 위험 수위에 도달하면서 외자 도입 비용이 급증하는데도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미성년 성매매와 탈세, 위증교사 등 3건의 재판에서 법정투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지난달 14일 2008년 총리직 복귀 이후 51번째 치러진 신임투표에서 살아남았지만, EU 지도자들과 금융권의 시각은 싸늘했고 이탈리아 정치 시스템의 무책임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오히려 커졌다.
무디스와 피치,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등 주요 신용평가회사들이 최근 이탈리아의 국가 및 은행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하면서 정치권의 위기 해결 능력 부재를 한목소리로 지적한 것은 바로 시장의 부정적인 기류를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지난 9월 중순 2013년까지 균형재정을 달성하기 위해 총 540억 유로(2014년까지 600억 유로)에 달하는 대규모 재정감축안을 마련하고도 이를 실행해나갈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지난달 EU 지도자들에게 보낸 의향서를 통해 연금 수급 시점 연기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경제개혁안 실행을 약속했지만, 지난 2일 긴급 소집한 각료회의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이로 인해 지난 3,4일 프랑스 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은 이탈리아가 실효성 있는 경제개혁 실행 방안을 조속히 내놔야 한다고 압박했다.
정상회의가 끝난 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은 베를루스코니의 사임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정치적 명운이 걸린 투표를 앞두고 7일과 8일 이탈리아 10년물 국채 수익률이 연속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것 역시 시장의 압박으로 해석된다.
금융시장은 현재 사임 여부를 놓고 고민 중인 베를루스코니가 어떤 결론을 내리느냐에 반응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베를루스코니의 사임 여부와 관계 없이 이탈리아가 안고 있는 문제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유로존 3위 경제국인 이탈리아는 기본적으로 총 1조9천억 유로(약 2조6천억 달러)에 달하는 국가채무, 만성적인 성장률 정체, 높은 실업률이라는 고질병을 안고 있다.
이탈리아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은 약 120%로 그리스 다음으로 높고, 독일(80.1%)과 프랑스(87.6%)보다는 훨씬 높다.
올 연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300억 유로 안팎의 국채, 내년에 만기도래하는 3천억 유로를 해결해야 한다. 실업률을 낮추고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것도 장기 과제다.
유로존 국가들이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의 가용재원을 레버리지를 통해 1조 유로 규모로 늘리기로 합의한 것이 방파제 역할을 하겠지만 근본적인 처방이 없으면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또 이탈리아 야당 역시 국민들로부터 대안세력으로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변수다.
그동안 숱한 성추문과 부패 의혹에도 불구하고 베를루스코니가 신임투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야권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낮은 지지율이 한 몫을 한 게 사실이다.
이와 관련, 포렉스닷컴의 애널리스트 캐슬린 브룩스는 AFP에 "베를루스코니 정부의 붕괴는 유로화와 이탈리아 부채, 주식시장이 오늘 하락을 멈추고 상승하는 원인이 됐다"고 분석했다.
브룩스 애널리스트는 그러나 "이탈리아 야당이 베를루스코니보다 더 나을 게 전혀 없다는 것을 시장이 깨닫게 되면 이런 상승세가 오래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국제 투기자본들이 취약한 시장을 골라가며 공세에 나서는 것을 감안하면 이탈리아 다음으로 스페인이 목표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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