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통신회담<10>
‘합격이냐, 불합격이냐.’
한국통신(현 KT)이 미 AT&T의 5ESS-2000에 대한 성능시험에 착수한 1995년 4월.
서울의 ‘녹색허파’ 도봉산에는 봄의 전령 진달래가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도봉산 아래 자리잡은 서울 도봉구 창동의 한국통신 도봉전화국(현 KT도봉지사) 방학분국은 봄의 전령이 채색한 도봉산 자태조차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한미통신회담 합의에 따라 방학분국에서 5ESS-2000의 제품 성능시험을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한미 양국 시선이 방학분국으로 쏠리면서 이곳에 팽팽한 긴장감이 넘쳐흘렀다.
한국통신과 AT&T는 그해 3월 4일과 20일 서신을 교환해 기존 합의 내용을 재확인 했다. 성능시험에 합격하면 인증절차를 거쳐 1995년 말 입찰참여를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AT&T는 한국통신이 성능시험을 시작하기도 전에 자사 제품을 그해 한국통신 조달에 참여할 것이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많은 전화국 중에서 왜 방학분국에서 5ESS-2000 성능시험을 하게 됐는가.
교환기 도입 업무를 총괄한 이정욱 한국통신 기술조정실장(그해 3월 한국통신 조직개편으로 기술조정실장 발령, KT 부사장, 한국정보인증 사장 역임, 현 한국정보통신감리협회장)의 증언.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방학분국은 신설국인데다 도심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시험환경이 쾌적했습니다. 다음은 미아전화국을 집중국으로 하고 있어 다른 기종과 인터페이스 시험과 국간 중계 연결시험이 편했습니다.”
이 실장은 시험평가반을 구성했다. 한국통신 연구개발원과 통신망연구소, 국제통신본부 등 산하 10개 기관에서 전문인력 30명을 차출했다.
한국통신은 5ESS-2000 시험 기간을 9개월로 잡았다. 성능시험 3개월과 현장 적응시험 6개월 등이었다.
한국통신은 AT&T로부터 넘겨받은 시험용 교환기 5ESS-2000을 방학분국에 설치했다. 평가반은 그해 6월말까지 3개월여에 거쳐 필수항목 274개를 평가했다.
이 실장의 회고.
“시험용 교환기는 목적 이외의 사용이 금지됐습니다. 교환기를 해체해서 그 성능을 분석했습니다. 미국 측은 기술이전을 우리 측에 하지 않은 상태여서 이 제품에 관심이 높았던 게 사실입니다.”
3개월간 성능시험을 실시한 결과 133개 항목이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일반기능과 ISDN, 패킷, 지능망 서비스 기능 등에서 한국통신 기준에 미달했다.
이 실장은 그해 6월 14일 김충세 AT&T 한국지사장(한국쓰리콤 사장, 포스데이타 고문 역임)에게 성능시험 기준미달 사항을 통보하고 즉시 보완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해 7월 13일 AT&T는 불합격한 자사 교환기의 지능망과 패킷 기능 등을 보완하려면 1996년 말이나 가능하다는 점을 한국통신에 통보했다. AT&T는 대안(代案)으로 우선 1995년 교환기 입찰에 참여하고 교환기 기능미비는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보완하는 방안을 한국통신이 수용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통신은 7월 6일 이종순 정보통신부 정보통신협력국장(아태전기통신협의체 사무총장 역임, 작고)에게 이런 결과를 보고하고 후속 대책도 협의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잘 아는 경상현 정통부 장관(현 KAIST 겸직교수)도 박창환 정통부 협력기획과장(작고)에게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도록해 그 결과를 보고받았다. 강문석 사무관(정통부 정책기획과장, 현 LG유플러스 부사장)도 실무라인이었다.
한국통신은 AT&T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다. 한국통신은 그해 7월 15일 교환기 성능시험을 중단했다.
이 실장의 계속된 증언.
“시험결과가 불합격인 이상 도리가 없었습니다. 부적합 사항을 보완해 주지 않아 시험을 할 수 없었습니다. 불합격 판정을 내리면 한미통신마찰이 불가피했습니다. 그렇다고 불량품을 구매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한국통신이 AT&T 측에 조건부 교환기 공급자격을 준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한국통신은 7월 24일자로 월터 J 소사 AT&T 아태지역회장 등에게 ‘성능시험 결과 기준미달인기능을 미국 측이 보완해 주지 않아 더 이상 성능시험을 진행할 수 없어 중지했으며 AT&T 측 요구사항은 검토가 끝나는대로 정식 문서로 통보하겠다’는 내용의 문서를 보냈다. 이는 AT&T 측에게 공급자격 부여가 불가능하다는 통보나 다름없었다.
이후 한국통신과 AT&T는 갈등관계로 변했다. AT&T는 미국정부를 앞세워 한국 측을 다시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 실장의 말.
“AT&T는 자사 5ESS-2000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신형 전자교환기라고 자부했어요. 한국통신이 제품 성능평가를 하는 것 자체를 내심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판에 교환기가 성능시험에 불합격 처분을 받았고 조달참여가 어렵게 됐으니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한국통신은 USTR에도 AT&T 제품의 불합격 내용을 문서로 보냈다.
한미 양국은 이에 앞서 그해 7월 5일부터 6일까지 워싱턴에서 기술표준분야 한미형식승인 상호인증 추진을 위한 통신전문가회의를 열었다.
한국 측에서 박정렬 정보통신부 기술기준과장(현 특허청 정보기획국장)을 수석대표로 최세하 사무관(한국정보통신기능대학 교수 역임, 현 개인사업)과 정현철 사무관(현 방통위 전파연구원 전파자원기획과장) 등과 전자통신연구소(현 ETRI)와 통신개발연구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주미 한국대사관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미국 측에서 USTR의 패트리샤 파오레타 통신과장을 수석대표로 미 연방통신위원회(FCC), 상무부 등 관계자 등이 대표단으로 나왔다.
회의에서 양국이 이견을 보인 유·무선 통신기기 형식승인 면제방식과 면제범위 등을 집중 협의하고 통신기기 상호인증협정 체결 등에 대한 양측 의견도 나눴다.
박 과장의 증언.
“한미 간에 형식승인 상호 인정에 이해를 달리 하는 점이 있었습니다. 회의에서 서로 자국 관련 제도를 소개하고 질의응답을 통해 한국 측에 문제가 없다는 점을 확인시켰습니다. 한국 측이 규제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기준에 따라 적용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우리가 미국 기준을 입수해 회의에서 근거를 제시했더니 미국 측도 납득했습니다.”
회의 초반에 USTR 측은 한국 인증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었다. 하지만 회의에서 미 FCC 전문가가 미국제도와 한국제도는 본질에서 같다고 인정했고 한국 제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양측의 쟁점은 해소됐다.
AT&T는 그해 8월 22일 한국통신에 “자사 제품이 성능시험에서 불합격한 것은 한국업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이익 조치를 받은 결과”라며 시정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왔다.
AT&T는 “교환기가 불합격한 것은 바뀐 기능규격을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한국통신 입찰을 불허하는 것은 지난 3월 양국정부 간 합의를 깨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AT&T는 교환기입찰에 참여하지 못할 경우 미정부에 슈퍼 301조에 의한 무역보복을 요구하겠다고 압박했다. 자사 교환기 불합격 책임을 한국통신 측에 떠넘긴 것이다.
한국통신 측은 이에 대해 “변경한 기능규격은 매년 신문에 공고하므로 특정업체에 늦게 통보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크리스티나 런드 USTR 부대표는 그해 10월 19일 “AT&T의 교환기 불합격은 한국통신이 관련 정보를 차별적으로 공개해 발생했다”면서 “이는 협정위반으로 제제조치 대상”이라고 말했다. AT&T 측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한국 측은 “한국통신 기술규격은 공개적인 입찰공고를 통해 공고되는 것으로 한국기업과 담합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입찰공고 이후 기술규격을 변경한 일이 없다”며 미국 측 주장에 반론을 폈다.
그해 10월 23일 박건우 주미대사(외무부 차관, 경희사이버대 총장 역임, 작고)를 만난 바세프스키 USTR 부대표는 AT&T의 한국통신 교환기 입찰 참여를 허용해달라고 요청했다. 캔터 USTR 대표도 그해 12월 1일 경상현 정통부 장관 앞으로 서한을 보내 한국통신이 12월 입찰하는 한국통신 교환기 분야에 AT&T 신기종을 참여를 요구했다.
캔터 대표는 이에 앞서 박재윤 통상산업부 장관(부산대학교 총장 역임)과 공로명 외무부 장관(현 세종재단 이사장) 등 통상장관에게 AT&T의 한국통신 교환기 입찰 참여를 강력히 요구했다. 미국 측은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한국에 제제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밝혔다.
경상현 장관은 12월 9일 캔터 대표에게 답신을 보냈다.
경 장관은 서한에서 “한국통신 입찰에는 신형이 아닌 기존제품은 모두 참여가능하며 기술규격은 이미 1992년 12월 30일 제정, 공표해 AT&T가 국내업체보다 늦게 규격을 알았다는 주장은 억지”라며 거부의사를 밝혔다.
한국통신도 이날 알렌 AT&T 회장과 통신망 부분 맥클린 사장에게 캔터 대표 서한을 반박하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한국통신은 “AT&T는 신형교환기 기능을 보완하는 일에 협조해 주고 더 이상 USTR 등 미국정부를 통한 통상압력은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국통신과 AT&T는 교환기 입찰 참여를 놓고 1995년 12월까지 밀고 당기는 힘겨루기를 계속했다. 한국통신과 AT&T 관계는 ‘화평(和平) 끝, 갈등 시작’이었다. 평화는 순간이고 갈등은 오래 갔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