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66>

 한미통신회담<9>

 

 창과 방패.

 한미통신회담에서 한국통신(현 KT)과 미 AT&T의 관계가 그랬다.

 한미 양국을 대표하는 이들은 한미 통신회담에서 늘 이익갈등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두 업체 관계에 따라 한미통신회담장은 냉온풍이 교차했다.

 AT&T는 미국정부를 앞세워 한국통신 교환기입찰 허용을 한국에 줄곧 요구했다. 1993년에는 AT&T의 한국통신 교환기공급자 자격인정을 놓고 한미 간 통신마찰이 빚어졌다. 미국은 한국을 ‘협정불이행국’으로 지정하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코너에 몰린 한국은 막판에 기존 공급기기에 한해 AT&T 입찰을 허용하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한국을 ‘협정불이행국’ 지정에서 제외했다.

 1994년 3월 31일.

 미 무역대표부(USTR)는 국가별 무역장벽(NTE) 연례 보고서에서 “한국이 정부조달에서 미 기업들을 차별 대우하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타깃은 한국통신이었다.

 AT&T는 그해 11월 한국통신에 자사 신 기종인 5ESS-2000 교환기를 구매해 줄 것을 거듭 제안했다. 그해 12월 22일 USTR도 주한 미국대사관을 통해 1995년부터 AT&T 신기종인 5ESS-2000을 한국통신에 공급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하는 비공식서한을 우리 측에 전달했다. 미국은 “만약 한국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한국을 ‘협정불이행국’으로 지정해 무역보복조취를 취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은 처지가 난감했다. 미국 요구를 거부하면 협정불이행국지정이란 압박카드를 들고 나올 것이고 요구를 수용하면 국내 교환기산업에 심대한 타격이 예상됐다.

 당시 한국통신의 구매절차는 3가지 유형이었다. 시판 중인 장비를 처음으로 조달하는 최초 조달, 시중에 없는 제품을 제조업체나 연구기관 등과 공동 또는 위탁개발한 후 조달하는 연구개발 조달, 이미 사용 중인 장비를 계속 구매하는 후속조달 등으로 구분했다.

 이 중 후속조달은 기존공급자가 부분적인 기능개선제품을 공급하는 개량개선(개량형)조달과 기존제품과 다른 신제품을 공급하는 신규참여(신기종)조달로 구분했다. 신기종 인증절차는 개량형보다 조달기간이 오래 걸렸다. 따라서 AT&T만 구매절차를 제외하는 것은 조달규정에도 어긋났다.

 국내 교환기국산화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 확실했다. 당시 한국은 신형국산교환기(TDX-10A)개발이 막바지 단계였다. 대용량 교환기(TDX-100)는 막 개발에 착수한 상태였다.

 이 무렵, USTR과 미통신위원회(FCC) 등에서 5명이 한국통신에 와서 일주일간 교환기 조달규정과 관련해 실태를 점검했다.

 한국통신 기술기획실장을 거쳐 네트워크본부장으로 AT&T 측과 교환기 조달협상을 했던 이정욱 본부장(KT 부사장, 한국정보인증 사장 역임, 현 한국정보통신감리협회장)의 회고.

 “표현이 실태점검이지 일주일간 감사를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당시 이런 상황을 정보통신부와 외무부, 통상산업부 등 관련부서에 설명하고 정부가 전자교환기 시장보호에 공동전선을 구축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처음엔 합동회의를 열어 ‘개방압력을 막아주겠다’고 하더니 외무부는 ‘한미외교 전략상 전자교환기 시장만을 보호해주기 어렵다’고 했고 통상산업부도 ‘대미 자동차 수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발을 뺐습니다. 달리 대안이 없었습니다. 제가 총대를 메기로 했습니다. 이종순 정보통신부 정보통신협력국장(아태전기통신협의체 사무총장 역임, 작고)에게 USTR에 ‘한국통신에게 지시를 해도 책임자가 말을 듣지 않는다. 워낙 원칙주의자여서 정부도 어쩔 수 없다’라며 모든 책임을 저한테 떠넘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이 국장이 통신회의에서 미국에 그런 말을 했어요.”

 이 실장은 1995년 1월 19일 하와이로 가 월터 J 소사 AT&T 아태담당 회장을 만나 한국 측 입장을 전달했다. 이 실장은 AT&T가 5ESS-2000을 한국통신에 공급하려면 한국통신 조달규정과 시험인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실장의 계속된 회고.

 “AT&T 측에 ‘만약 한국통신이 AT&T 교환기에 대해서만 시험인증절차를 생략한다면 한국산 제품에 대해서도 인증시험을 할 수 없다. 그러면 한국통신의 통신장비 조달규정은 유명무실하게 된다. 따라서 AT&T도 한국통신 조달규정에 따라야 한다’며 설득했습니다. 24시간 그들과 회의 끝에 어렵게 합의문을 작성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험항목과 기간을 놓고 양측은 줄다리기를 했다. 조달규정에 따르면 800개 항목에 대해 시험을 실시할 경우 10개월가량 걸렸다. AT&T 관계자는 “기간이 너무 길다”며 펄쩍 뛰며 기간을 단축시켜 달라고 했다. 양측은 격론 끝에 9개월로 한국이 제시한 10개월보다 1개월을 단축하기로 했다.

 양측이 합의한 내용은 △5ESS-2000교환기는 한국통신의 규정에 따라 시험을 거쳐 공급 △시험용 교환기를 1995년 3월 말까지 설치, 1995년 4월부터 11월까지 시험하며 시험기간이 단축될 수 있도록 노력 △AT&T가 1995년도 전자교환기 공급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양측에서 신중히 검토 △본 협의결과를 바탕으로 양측 회사가 양국정부를 이해시켜 양국 간의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등 4개 항이었다.

 그해 2월 13일 미국을 방문한 박재윤 통상산업부 장관(재경부 장관, 아주대 총장 역임)을 만난 미키 캔터 USTR대표는 “한국의 통신장비는 형신승인 및 구매절차 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그해 2월 28일. 한미 양국은 서울 정보통신부 회의실에서 이종순 정보통신협력국장과 크리스티나 런드 USTR 한국담당국장이 각각 수석대표로 참석한 가운데 통상실무회의를 열었다.

 한국 측 통신회담 대표단에 멤버교체가 있었다. 그동안 장관 자문관으로 협상자문과 통역을 담당했던 최병일 박사(현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WTO기본통신협상 업무를 맡게 됨에 따라 정인억 박사(KISTI 부원장 역임, 현 국가정보화전력위원)가 그 업무를 넘겨받았다. 정 박사는 미 밴터빌터대학원 경제학 박사로 1993년부터 통신개발연구원에서 근무했다. 정 박사는 한미통신회담에서 자문역할과 통역을 맡았다.

 정 박사의 회고.

 “최병일 박사 후임으로 제가 그 임무를 맡았습니다. 1997년 8월 한국에 대한 PFC지정 해제까지 협상단에서 일을 했습니다.”

 미국 런드 대표는 회의에서 한국통신 조달과 관련, “AT&T의 신기종 5ESS-2000 인증문제가 차별을 받고 있다. 이는 협정위반사항이다. 이달 말까지 5ESS-2000교환기의 인증 등 주요 현안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한국을 미 종합무역법에 따라 불공정무역관행국으로 지정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종순 국장은 이에 대해 “법에 규정된 새 교환기 품질인증을 미국 기업에만 면제하는 것은 어렵다. 인증이 지연되는 것은 AT&T 측이 관련 서류를 늦게 냈기 때문”이라며 거부의사를 밝혔다.

 미국은 PCS(개인휴대통신) 등 신규 무선통신서비스의 참여문제, 제2 이동통신사업자인 신세기통신의 장비구매 관련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철폐 등도 요구했다. 한미 양측은 교환기 관련 이견(異見)은 한국통신과 AT&T가 별도 협의를 통해 해결키로 하고 회의를 끝냈다.

 한국통신은 그해 3월 4일 ‘조건부 공급자격 부여방안’을 마련, AT&T에 전달했다.

 한국통신의 방안은 △한국통신이 AT&T의 조달참여를 허용하고 대신 △AT&T는 한국통신 조달 규정과 필요한 절차를 거치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다. 양측의 주장을 절충한 안이었다.

 그해 3월 10일 박건우 주미대사(외무부 차관, 경희사이버대 총장 역임, 작고)를 만난 바세프스키 USTR 부대표는 미국 측 입장을 담은 비공식 서한을 전달했다.

 미국 측은 서한에서 △AT&T의 교환기 입찰 참여보장 △형식승인 관련 제도개선 △제2 이동통신사업자 장비구매 추가협의 등을 3월 31일까지 서한으로 약속해 줄 것을 요구했다.

 미국 요구사항이 국내에 알려지자 국내교환기 업체들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삼성전자와 대우통신, LG정보통신, 한화전자정보통신 등 교환기 4사 실무대표들은 3월 13일 상의클럽에서 한국통신산업협회(회장 박성규) 주관으로 기자회견을 갖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들은 △AT&T 교환기 5ESS-2000은 신기종이기 때문에 반드시 적합성 시험을 한 후 국내 절차와 규정에 따라 한국 조달입찰에 응해야 하며 △AT&T의 교환기 인증문제는 한국통신과 AT&T 간의 문제로 정부가 미국 압력에 굴복, 특정업체에 특혜를 주는 식의 불공정한 방식을 취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미의회 협정불이행국 지정 시한인 3월 말을 며칠 앞둔 시점이어서 한미 양국은 막후채널을 가동해 타결을 위한 사전정지 작업을 벌였다.

 한국은 3월 20일 한국 측 입장을 정리한 비공식서한을 미국 측에 전달해 가급적 조속한 타결 입장을 전달했다. AT&T도 이날 한국통신이 제안한 ‘조건부 공급자격 부여’ 방안을 수용한다는 입정을 밝혔다.

 한미 양국은 3월 21일 워싱턴DC USTR 회의실에서 한미통신실무협의회를 열고 AT&T의 교환기 및 CNT의 LAN(근거리통신망)장비의 한국 시장진출문제 등에 대한 최종 입장을 조율했다.

 한국 측에서 이종순 정보통신협력국장을 단장으로 한국통신, 통신개발연구원 등 관계자 7명이 참석했다. 미국 측에서는 크리스티나 런드 USTR 한국담당국장 등이 참석했다.

 이 회의는 당초 22일까지로 예정했으나 일정을 25일까지 연장했다.

 한미 양국은 협상에서 한국통신 교환기 조달문제는 당사자인 두 업체의 합의사항을 정부 간 합의서한으로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해당 업체가 합의한 대로 5ESS-2000 교환기는 한국 주장처럼 신기종으로 간주해 납품 전까지 모든 인증절차를 생략 없이 진행하되 성능시험에 합격하면 1995년 말 한국통신 교환기 공급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그해 4월 19일. USTR은 종합무역법 제1377조에 따라 연례점검을 실시한 결과 한국의 협정위반 사실은 없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AT&T 신형교환기를 한국통신에서 성능시험을 하고 그 결과가 나오자 양국은 다시 갈등국면에 접어들었다.

 통신시장 개방을 놓고 한미 양국은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수시로 적과 동지 사이를 오갔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