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덕의 정보통신부 그시작과 끝] <57>CDMA 개발,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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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현 전경련 회장(앞줄 가운데)이 1994년 2월 28일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신세기이동통신을 최종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CDMA개발, 그 이후

 

 역사에 가정(假定)은 부질없다고 한다. 하지만 가정을 통해 역사의 물줄기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뒤집어 보는 것은 의미가 크다. CDMA 개발은 한국 ICT의 희망버스였다. 몇 번의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희망버스는 CDMA 기술종주국이란 목적지에 안착했다.

 CDMA 상용화 후 이런저런 가정이 등장했다. 인터넷상에 아직도 가정을 전제로 한 의견이 올라와 있다.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퀄컴의 CDMA 기술을 ‘우리가 샀더라면 막대한 로열티는 지불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내용이다. 다른 하나는 ‘정부가 제2 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을 연기하지 않았다면 과연 CDMA 상용화가 가능했을까’ 하는 점이다.

 하지만 국내 기업이 퀄컴을 인수했거나 정부가 사업자 선정 시기를 늦추지 않았다면 CDMA 세계 첫 상용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판단이다.

 CDMA 방식을 개발하기 위해 정부는 미국 퀄컴에 막대한 선급기술료를 지불했다. 1991년 5월 6일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와 퀄컴 측은 CDMA 원천기술 공동개발을 위해 3단계에 걸쳐 총 1695만달러(120억원)를 지급하기로 하는 협약을 체결했다.

 정부는 1단계 190만달러, 2단계 1000만달러, 3단계에 505만달러를 지급했다. 이원웅 ETRI 부소장 겸 무선통신개발단장(인하대 정보통신공학과 교수 역임)이 퀄컴 측과 협상해 결정한 로열티는 5%였다. 이 중 20%는 ETRI가 되돌려 받기로 했다.

 이원웅 부소장의 말.

 “서로 줄다리기를 하다가 로열티는 5%로 했습니다. 대신 공동개발이므로 양측이 로열티를 5 대 5로 분배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퀄컴 측은 한국 측 TDX-10 기술을 다 넘겨 달라고 요구했어요. 최종 퀄컴 측과 80 대 20으로 타결했습니다. 퀄컴 측에 가는 로열티는 4%가 된 셈입니다.”

 CDMA 지정개발업체들도 퀄컴 측에 선급기술료와 로열티를 지불했다. 로열티와 관련해서 5%가 너무 많다는 주장이 업계에서 제기됐다. 로열티 문제는 나중에 쟁점이 됐다(로열티 분쟁은 추후 다루기로 한다). 이런 관계로 퀄컴을 인수하거나 아니면 CDMA 기술을 매입했으면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는 가정이 등장했다.

 CDMA 도입의 주역인 경상현 정통부 장관(현 KAIST 겸직교수)의 증언.

 “그 무렵 유사한 말을 듣긴 했지만 실제로 그런 접촉이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당시 퀄컴 측은 처지가 궁색했다. CDMA 방식의 이동통신기술을 개발해 시연까지 끝냈으나 미국 내에서조차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 판에 한국이 공동개발을 제안하자 퀄컴 측은 한국에 목을 매는 상황이었다.

 CDMA 기술을 당시 경상현 ETRI소장에게 처음 소개하고 이후 기술도입과 협약 과정에 깊이 관여했던 박헌서 박사(현 한국정보통신 회장)의 회고.

 “강진구 삼성전자 사장(삼성전자 회장 역임)을 만나 CDMA 기술을 소개한 적은 있습니다. 강 사장이 ‘CDMA가 뭐냐’며 묻더군요. 그래서 기술 내용을 설명했더니 ‘아 그래’ 하면서 ‘그거 삼성전자하고 같이하자’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박 회장은 미 코넬대 정보통신공학 박사로 경 소장이 1976년 말 전자교환기 도입기종 선정 총괄책임을 맡았을 때 생산반 책임자로 함께 일했다. 그후 ETRI 전신인 한국전자기술연구소장을 역임한 후 미 팩텔 한국지사장을 맡고 있었다. 팩텔사는 퀄컴에 투자를 해 퀄컴의 CDMA 기술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삼성전자는 실제 퀄컴과 기술이전 등에 관한 별도 협상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삼성전자에서 이동통신 개발 관련 업무를 총괄한 김영기 상무(한화정보통신 대표 역임)의 말.

 “퀄컴과 개별 접촉한 일이 없습니다. 퀄컴과 로열티 협상을 할 때도 저는 ‘왜 정부가 나서느냐’고 반론을 제기했어요. 삼성의 로열티는 3%를 넘지 않았어요. 퀄컴은 협상도 정부채널을 이용했습니다. 퀄컴 제이콥스 회장은 유태계입니다. 그들의 상술은 대단하잖아요.”

 김 상무는 체신부 출신으로 삼성에서 무선호출기를 개발해 성공했고 1999년까지 삼성에서 무선통신 사업을 주도했다.

 퀄컴은 전자교환기 관련 기술이 부족했다. 설계능력은 우수했지만 대량생산이나 제조기술이 취약했다. 미 퀄컴은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국기업 인수의사를 타진한 적이 있었다.

 박 회장의 계속된 회고.

 “퀄컴 제이콥스 사장을 만났더니 한국의 맥슨전자를 인수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귀국해 윤두영 맥슨전자 회장(현 미국 거주)을 만나 퀄컴 측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퀄컴에서 ‘인수의사를 가지고 있던데 혹시 의향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윤 회장이 그냥 씩 웃고 넘기시더군요.”

 윤 회장는 일동제약 창업주인 고 윤용구 회장 장남이다. 미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귀국해 1972년 인켈의 전신인 인터내셔날 일렉트로닉스를 설립했다. 이후 이 회사를 동원전자에 넘기고 1974년 맥슨전자를 설립했다.

 이원웅 ETRI 부소장의 말.

 “기술료를 주느니 퀄컴을 인수하는 게 어떠냐는 말이 나돌긴 했습니다. 실현가능성이 없는 아이디어 차원이었습니다. ETRI는 그런 검토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장과 감사 등 경영진을 파견해야 하는 점도 문제지만 미국에서 한국식으로 경영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박성득 체신부 정보통신정책실장(정통부 차관 역임, 현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의 증언.

 “만약 국내 기업이 단독으로 퀄컴에서 기술을 이전받았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선 CDMA 개발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할 수 없습니다. 다음은 미국이 CDMA 기술을 표준으로 결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미국 기업이 특허권을 가진 기술이고 퀄컴이 로비를 벌여 미국 표준으로 결정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은 아날로그와 달리 디지털시스템은 정부가 단일표준을 정하지 않고 업계가 다수결로 결정했다. 당시 언론은 퀄컴사가 규모가 작고 경영난이 극심한 것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고 한다.

 퀄컴사를 수차례 방문했던 이혁재 ETRI 부장(현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의 회고.

 “퀄컴이 처음 시작할 때는 벤처기업이었겠지만 CDMA 기술을 개발했을 당시는 인원이 700~800명에 달했습니다. 퀄컴 경영진인 어윈 제이콥스와 앤드루 버터비는 1980년대까지 통신공학의 최고봉이었습니다. 퀄컴사는 미국에서 위성통신시스템을 이용해 차량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옴니트랙스라는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가입자가 많았습니다. 그 사업에서 수익을 내고 있었어요.”

 이영규 ETRI 본부장(TTA전문위원 역임)의 말.

 “역사는 결과론입니다. CDMA 개발이 성공하니까 호사가들이 퀄컴 인수 등의 말을 하는 것이지 당시는 그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CDMA 성공여부조차 불투명했습니다.”

 두 번째는 제2 이동통신사업자의 서비스 시기 연기다.

 선경의 대한텔레콤 사업권 반납이 선경에는 뒷날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의 경영권을 확보하는 씨앗이 됐고 정부에는 CDMA 상용화 시간을 벌어줬다는 것이다. 대한텔레콤이 1992년 8월 26일 사업권을 획득해 곧바로 서비스를 시작했다면 CDMA는 성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국내 장비시장은 모토로라 등 외산이 독점하고 있었다. CDMA 개발은 그해 1월 31일 퀄컴과 1단계 공동개발을 끝냈고 2단계를 진행 중이었다. 그해 12월 14일 이동통신시스템을 생산할 국내 지정업체를 선정했다. 그런 상황이니 CDMA 방식의 서비스는 불가능했다.

 윤동윤 체신부 장관(현 한국IT리더스포럼 회장)은 1993년 6월 15일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시기를 1년 후로 연기했다. 윤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디지털장비의 상용화가 1995년 말이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해 1994년 6월까지 사업자를 선정하고 1년 반 정도 준비하면 1995년 말부터 서비스가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윤 장관의 회고.

 “사전에 청와대와 협의를 했어요. 우리는 남이 하지 않는 신기술을 개발해야 CDMA 기술종주국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CDMA 개발에 장관직을 걸겠다’고 한 것입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1994년 2월 28일 신세기이동통신을 제2 이동통신사업자로 최종 선정했다.

 그해 10월 25일 에스코 아호 핀란드 수상이 경제인단 25명과 함께 한국에 왔다. 노키아 회장도 동행했다. 두 나라 경제인들은 28일 전자통신, 기계금속, 환경산업분야 등에서 합작투자와 기술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윤 장관은 이 기간에 극비리에 하얏트호텔에서 노키아 회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 서정욱 박사(SK텔레콤 사장·부회장, 과기부 장관 역임)를 참석시켰다.

 윤 장관의 증언.

 “노키아 회장에게 ‘노키아에서 CDMA 방식의 단말기를 만들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노키아 회장이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후 서 단장에게 노키아에 다녀오도록 했습니다. 이런 소식이 삼성전자와 LG정보통신 등에 알려지자 이들이 단말기 개발에 적극 나섰습니다. 국내 기업들이 불참할 경우에 대비한 차선책이었습니다.”

  1995년 10월 초, CDMA 방식에 또 위기가 닥쳤다.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은 롯데호텔에서 한승수 대통령비서실장(국무총리 역임)과 배석자 없이 단독으로 만났다. 한 실장은 경 장관에게 “PCS 접속방식을 CDMA 단일표준으로 고집할 이유가 있느냐”면서 “신세기통신에 TDMA 방식을 허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경 장관은 “그렇게 하면 국책사업으로 추진한 CDMA 개발은 사장(死藏)되고 만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했다. 대통령의 뜻을 거부한 것이다. 경 장관은 그해 12월 개각에서 경질됐다.

 이석채 정통부 장관(현 KT 회장)은 1996년 1월 중순 김영삼 대통령과 독대해 CDMA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건의해 방식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CDMA는 상용화 이후 바다 넘고 하늘을 날아 세계를 누볐다. 남이 하지 않은 일을 해 이룩한 기술신화의 선물이었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