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인도에서 열린 비즈니스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존 체임버스 시스코 CEO는 8000마일이나 떨어진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 있는 마틴 드 비어 부사장을 무대로 불러내 서로 마주보며 대화하는 모습을 대중 앞에 선보였다. 이는 시스코가 만든 3D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기술의 하나인 ‘온스테이지 텔레프레즌스’ 기술로 가능했다.
수천㎞ 떨어져 있는 지인이 보고 싶을 때는 그저 상대를 내가 있는 곳으로 소환하면 되는 시대가 머지않았다. 많은 사람이 홀로그램이라고 하면 영화 ‘스타워즈’를 떠올리며 앞으로 20~30년 후에나 가능할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홀로그래피는 코앞에 닥친 차세대 패러다임이다. IBM이 선정한 2015년 유망기술 중 하나가 홀로그래피기도 하다.
지식경제부·문화체육관광부 등 유관부처도 최근 들어 디지털 홀로그래피에 관심을 갖고 투자에 나서는 형국이다.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중요성이 인식됐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서도 “3DTV 시장과 마찬가지로 홀로그래피도 (주도권을) 가져와야 하는데 선진국에 비해 너무 늦었다”고 우려를 감추지 않는다.
◇포스트3D, ‘홀로그래피’를 잡아라=관련 업계에서는 ‘3D 다음은 홀로그래피’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3D에서 아직 제대로 상용화되지 않은 무안경 방식의 3D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기술적으로 구현이 너무 어렵고 구현하더라도 고비용 저수익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삼성·LG 등 업계는 바로 홀로그래피로 넘어가기 위한 물밑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홀로그램은 그리스어로 ‘전체(holo)’와 ‘메시지(gramma)’라는 의미를 합친 개념으로 간섭파 형태로 물체의 영상이 기록된 사진 필름이란 뜻이다. 홀로그래피는 해당 데이터를 입체영상으로 재생하는 기술을 말한다. 1947년 데니스 가르보가 발명해 1971년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홀로그래피는 3D보다 한층 진화된 입체영상을 제공한다. 양쪽 눈의 시차를 이용해 사물 일부분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3D와 달리 홀로그래피는 시차를 조절하지 않아도 360도 어느 각도에서 봐도 온전한 입체영상을 제공한다.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현실감이 뛰어나 2D 영상산업이나 스테레오 3D산업보다 응용 분야가 광범위하다는 점도 홀로그래피의 매력이다. 영상회의나 건축설계, 전자책 등은 물론이고 가까운 미래에 TV·게임·쇼핑·유물전시 분야에 쓸 수 있다. 나아가 원격 수술이나 비행 시뮬레이션, 군사작전 훈련에도 폭넓게 응용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IBM이 2015년 모바일 홀로그래피 시대가 온다고 못을 박은 데는 당연히 근거가 있다”며 “현재 부품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홀로그램 영상을 부양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고 설명했다.
◇태동하는 시장…패러다임 주도권 쟁탈전 ‘치열’=홀로그램은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아직 상용화 모델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갓 태동하는 시장인 탓이다. 그러나 선진국별 연구개발(R&D) 및 상용화 진행률에는 상당한 온도차가 존재한다. 일본·유럽연합·미국 등에서는 정부 또는 민간이 적극적인 예산투자와 기술 확보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 가장 막대한 투자를 쏟아붓고 있는 국가는 일본이다. 일본은 총무성 산하 정보통신연구기구(NICT)를 중심으로 상용화 중심 연구를 진행 중이다. 3DTV 주도권은 한국에 뺏겼지만 그 다음인 홀로그램TV는 반드시 주도하겠다는 것. 일본은 오는 2016년 홀로그래피 TV를 시장에 내놓고, 2022년 월드컵을 유치해 홀로그램 방송을 추진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한 기본 원리 테스트까지 마친 상태며 예산은 무려 45억달러(약 5조5000억원)다.
유럽연합은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등 기술이전으로 상용화 추진에 집중하고 있다. 디지털 홀로그램 등 실용적 연구가 중심이며 예산은 3600만유로(약 550억원)에 달한다.
MIT 미디어랩, 버지니아공대 등 대학·기업 등 민간을 중심으로 연구 중인 미국은 햅틱 홀로그램과 같은 미래 원천기술 위주로 연구한다. 최근 홀로그램 동영상 재생 시스템인 ‘홀로비디오’를 개발했으며 차별화할 수 있는 새로운 기법이나 융합 원천기술 확보가 중요하다는 시각이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상용화는 기초 학문을 기반으로 한 실험실 수준의 연구에 머무르고 있다. 서울대·광운대·세종대·충북대 등 국내 몇몇 대학과 KIST 등 연구기관에서 산발적인 연구가 진행됐으며 정부과제로 떨어진 예산은 수십억원 규모에 그칠 뿐이다. 국내 한 연구기관 관계자는 “해외에서는 홀로그래피로 뛰어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걷지도 않고 있다”고 일갈했다.
◇우리나라, 인재가 없다=전문가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홀로그래피 전문가라고 부를 만한 인재는 채 20명이 안 된다.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홀로그램이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여도 패러다임이 오지 않자 연구 분야를 바꾼 인재가 많기 때문이다.
홀로그래피 한 길만 걸어온 ‘골수분자’가 아닌 이상 홀로그래피만을 연구하는 교수들은 없는 상태다. 후진양성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 것.
홀로그래피 산업을 연구해 왔다는 한 전문가는 “이제라도 강호에서 설움 받던 연구자, 교수를 비롯해 물밑작업을 진행 중인 삼성전자·LG전자 등 기업체, 광학산업계 중소 부품업체를 다 끌어모을 필요가 있다”며 “산학연 연계로 실현 가능한 R&D 계획이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공존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 조성도 필요하다는 주문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3D 시장이 돈이 되기 시작하자 그동안 악전고투하며 3D시장을 그나마 이끌어왔던 중소기업은 다 문을 닫거나 닫을 지경에 처했다”며 “홀로그래피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대·중소기업 공존모델을 만들어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게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아바타가 어느 날 툭 튀어나왔듯 홀로그래피도 티핑포인트가 올 것”이라며 “홀로그래피는 3D기술의 연장이 아닌 전혀 다른 원리의 기술이다. 갑자기 패러다임이 왔을 때 손놓고 당하지 않도록 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미나기자 mina@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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