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징이슈]바이러스 전쟁

 지난 10일 호흡기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보이는 임산부가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다. 이 환자는 일반 호흡기 바이러스 감염 환자와 달리 폐가 염증으로 인해 딱딱해지는 ‘폐 섬유화’ 증상을 보여 왔다. 이 환자 외에도 총 8명이 유사한 증세를 보이고 있어 방역당국이 정확한 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사망한 환자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라면 기존의 바이러스와는 확연히 다른 변종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처럼 기존의 병세와 다른 단 한 명의 사망환자 때문에 비상체계를 가동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은 인류사의 흐름을 바꿔 놓을 정도로 중대한 ‘사건’이다. 인류사 자체가 바이러스와의 전쟁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바이러스 전쟁, 스페인 독감부터 ‘사스’까지=지난 2003년 2월 10일. 세계보건기구(WHO) 베이징 지부는 중국 광둥성에서 100명 이상이 ‘이상한 전염병’에 감염됐고 불과 일주일 사이에 여러 명이 사망했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받았다.

 중국 정부가 쉬쉬 하는 사이 괴질은 세계에서 사람이 가장 붐비는 홍콩 한복판으로 퍼졌다. 연구 끝에 ‘사스(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라는 이름이 붙은 이 ‘신종 살인마’는 이후 급속도로 확산됐고 혈액의 산소운반 능력을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사스 바이러스는 환자들의 폐를 공격했고, 환자들은 물이 아닌 땅 위에서 익사하듯 숨을 거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사스는 대재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스가 사라졌다고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대재앙을 준비하며 어디에선가 더 힘을 키우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18년 발생한 스페인 독감으로 5000만명이 희생된 것처럼 대재앙이 발생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바이러스 반격의 시작=최근 수십년간 인류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감에 도취돼 있었다. 2003년 사스 위기가 많은 희생자를 내기는 했지만 비교적 잘 넘기는 등 지난 100년간 공중보건을 위협할 만한 대재앙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탓이다.

 적어도 스페인 독감 당시처럼 병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바이러스의 존재 자체조차 모르던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인류가 우위에 있다. 최근의 신종플루 사례에서 보듯 적이 어디에서 어떤 경로로 출현했는지를 놓고 설왕설래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이는 대책을 수립하는 데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에서 발생하는 바이러스의 위력은 최근 들어 점차 강해지고 있다.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홍콩에서 처음 발견된 지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동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으로 퍼졌고 2005년과 2006년에는 아시아 대부분과 유럽·중동·아프리카로 퍼졌다. 2003년에는 한국·중국·일본·대만·캄보디아·인도네시아·라오스·베트남에서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 H5N1이 출현하여 가금류를 몰살시켰고 베트남과 대만에서는 희생자도 발생했다. 2007년까지 중국·터키·캄보디아·인도네시아·이집트·지부티·이라크에서도 사망자가 나타났다.

 현재 H5N1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거의 가금류 풍토병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까지 적어도 2억마리가 넘는 가금류가 살처분됐으며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혔다.

 이 병은 인간끼리 감염된 사례가 거의 없지만 2007년 12월 1일을 기준으로 65개국으로 퍼졌고 전 세계적으로 335명이 감염돼 206명이 사망했다. 치사율이 61%에 달한다. 게다가 조류 인플루엔자는 야생 새를 통해 전파되므로 감시와 방제가 쉽지 않다. 균주에 따라 동일한 환경에서도 생존 기간이 차이날 수 있는데, 물새가 지표수에 배설한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pH, 염도, 수온에 따라 장기간 존속할 수도 있다.

 물론 지금까지 인간 감염자는 감염된 조류를 직접 만지거나 다룬 사람이 대부분이며, 지표수가 인간 감염의 원천이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WHO는 감염 지역에서 지표수를 그냥 마시거나 끓이고 정화하지 않은 물로 닭고기 등을 닦는 일은 피하라고 당부한다.

 수세기 동안 열등한 동물에만 나타나던 바이러스가 최근 인간이 거주하는 도시와 농장을 습격한 데 이어 인체에까지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스페인 독감 다시 창궐할 수도=바이러스의 경우 잠복상태를 유지하다가 인간 유전에 의해 후대에서 재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언제든지 인류를 위협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 2009년 유행한 돼지 인플루엔자(SI) 바이러스가 스페인독감과 관련성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미국 캔자스주립대 연구진은 바이러스 분야 국제학술지 ‘바이러스학 저널(Journal of Virology)’에서 돼지 인플루엔자 H1N1 바이러스는 1918년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이 연구에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와 1930년 미국 중서부에서 유행한 돼지 독감으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돼지 독감 바이러스 H1N1을 돼지에 감염시키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이 두 바이러스에 감염된 돼지에서 나타나는 증상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두 바이러스는 모두 돼지를 감염시키고 증식하면서 가벼운 호흡기 질환 증상만 일으켰다.

 연구진은 스페인 독감이 1918년 전 세계에서 수천만명의 사망자를 냈고 흰족제비와 생쥐, 원숭이 등에도 치명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에 감염된 돼지가 심각한 증세를 보이지 않은 것은 놀라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또 이 연구결과는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와 현 SI 바이러스가 같은 계통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가 돼지들에 확산해 적응해 있다가 현재의 SI H1N1 바이러스 계통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는 두 차례 세계대전의 희생자보다 더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뒤 1919년 갑자기 사라졌다. 한 전문가는 이 정도 영향력을 지닌 바이러스가 지금 세계로 퍼진다면 20억명이 넘는 인구가 감염되고 1억8000만~3억6000만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게다가 갈수록 속도를 더해가고 있는 세계화·도시화 과정은 바이러스 창궐에 취약한 구조다. 인구가 대부분 도시로 집중되어 교류하고 있고 사람들의 이동이 더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바이러스의 유전자 재편성이 일어날 가능성은 커지면 커졌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조만간 다시 큰 여파를 미칠 인플루엔자 대발생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하고 있다.

안석현기자 ahngija@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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