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해외 법인에 글로벌싱글인스턴스(GSI) 전사자원관리(ERP)를 적용하면서 ERP 구축 트렌드는 크게 두 가지 변화를 맞고 있다. 첫 번째는 ERP 패키지 내 프로세스의 표준 적용률이 높아지면서 커스터마이징 최소화가 정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법인만을 대상으로 할 때는 입맛에 따라 추가 개발을 할 수 있었지만 해외 법인의 업무 환경은 제대로 지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ERP의 서비스지향아키텍처(SOA)화다. SOA는 비즈니스에 IT의 민첩성과 유연성, 기존 개발한 기능의 재활용 등 많은 가치를 제공하지만 ERP만큼은 SOA의 논외 대상이었다. 기업 역시 ERP는 으레 오랜 구축 기간과 많은 투자 비용을 들여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급변하는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에 적시 대응하기 위해서는 ERP에도 SOA 적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높다. 특히 최근의 ERP 기술 발전은 기업이 비즈니스의 중추 플랫폼으로서 ERP를 재정비하도록 하고 있다.
◇높은 구축 비용과 오랜 구축 기간, 왜 당연시하나=많은 최고정보책임자(CIO)가 ERP 시스템 구축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는 것은 높은 구축 비용과 오랜 구축 기간, 다른 업무 시스템과의 연동 작업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GSI ERP 프로젝트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2009년부터 GSI ERP를 구축해온 만도의 경우 한국을 포함해 세계 11개 공장에 모두 구축하는 데 3년 이상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GSI ERP 막바지 단계로 올해 인도법인 적용만 남겨둔 LS전선 역시 가장 큰 고충으로 장기간 소요되는 구축 기간을 꼽았다. 민관기 담당(CIO)은 “2009년 이전 5개 법인, 2010년 6개 법인 등 해외 법인을 대상으로 ERP 확장 구축을 해 왔는데 롤아웃 프로젝트의 경우에도 보통 5~6개월이 소요된다”며 “롤아웃 프로젝트는 3개월이 적당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올해 GSI ERP 첫 삽을 뜨는 범한판토스 역시 구축 기간이 큰 고민이다. 전 세계에 동시 오픈하는 빅뱅 방식을 채택할지 지역별로 단계적 오픈하는 방식을 채택할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20개월 내 완료한다는 계획이다. 김석태 상무(CIO)는 “ERP만 구축한다고 했을 때 1년 이내에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전했다.
기업이 ERP 구축 기간에 우려를 나타내는 것은 기간이 길어질수록 예산 증가는 물론이고 법·규제를 포함한 비즈니스 환경의 변화에 적절한 대응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ERP 구축 프로젝트 중에 IFRS나 FTA 등 새로운 법·규제가 등장하면서 ERP 요건 정의가 추가되고 설계 변경, 비용 증가는 물론이고 프로젝트 납기 또한 지키지 못하게 된다.
ERP 구축 기간은 추가 개발 작업이 관건이다. 커스터마이징과 시스템 연동 등 개발 작업에 영향을 받으며 이는 구축 기간과 비용 모두에 영향을 준다.
ERP 표준 프로세스에서 제공되지 않거나 기업 환경에 적합하지 않을 경우 코딩에 의한 개발 작업이 ‘커스터마이징’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다. 커스터마이징은 ERP 구축비용과 기간을 줄이는 핵심이다. 또 시스템 간 연동을 위해 기업애플리케이션 통합(EAI), 데이터 통합, 비즈니스프로세스관리(BPM) 시스템 등 ERP 자체 구축 외의 작업도 많다. 특히 비즈니스 애플리케이션이 늘고 실시간 지원이 요구될수록 더욱 많은 기업 내 정보시스템과 데이터 통합이 요구된다.
◇커스터마이징과 통합 작업의 재발견=최근 GSI ERP를 구축하는 기업들에서는 커스터마이징 비율이 크게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전과 같이 ‘한국형 ERP’라는 이름으로 국내 특수성을 반영할 경우 해외 법인의 업무 환경은 제대로 지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구축 당시 추가 개발이 많을수록 추후 업그레이드와 유지보수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삼성중공업의 경우 조선/해양 부문 ERP 구축 후 전기전자, 풍력 등 신규 사업에 ERP를 구축했는데 단 8개월 만에 완료했다. 비용 역시 기존 ERP 구축과 비교하면 3분의 1 수준이었다. 황규옥 그룹장은 “ERP 표준 적용률이 95% 이상이었기 때문에 컨설턴트와 개발자 사용을 최소화한 것”에서 이유를 찾았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 내부 인력의 ERP와 업무 프로세스의 이해도가 관건이라고 덧붙였다.
김준 삼정KPMG 상무는 커스터마이징을 무엇으로 정의하는지에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기업은 자사의 프로세스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기능, 편리한 기능을 시스템(애플리케이션)에서 지원하지 않을 때 개발하는 것을 커스터마이징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해당 프로세스가 비즈니스 시나리오 상에서 기업의 가치를 창출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는지 검토하는 것은 종종 간과된다는 것이다. 기업의 가치를 창출하고 프로세스 역량을 강화하는 데 필수적인 의미있는 커스터마이징을 구별해내는 것이 먼저라는 설명이다.
강우진 한국오라클 상무는 “현행 커스터마이징의 가장 큰 문제는 As-Is 혹은 As-Was에 맞춰 개발한다는 것”으로 지적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기업 프로세스 전략에 따라 To-Be 모델에 필수인 기능 개발이 의미있는 커스터마이징이 되는 셈이다.
커스터마이징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다면 남은 문제는 다른 정보시스템과의 연동 작업이다. 공급망관리(SCM), 생산관리시스템(MES), 고객관계관리(CRM), 제품수명주기관리(PLM) 등 업무 프로세스에 따른 유관 시스템 간 연동과 데이터 통합 작업은 ERP 프로젝트 기간을 늘리는 또 다른 주범이다. 실제로 ERP 자체의 구축보다 업무 시스템 간 연동 작업을 더 큰 고충으로 꼽는 CIO도 많다.
웅진그룹의 경우 올해 웅진에너지, 웅진케미칼 등의 계열사에 사용 ERP 모듈을 확장할 계획이다. 기존에는 재무회계(FI), 관리회계(CO), 인사관리(HR)만 사용했지만 자재관리(MM), PP(생산관리), 품질관리(QM), 영업관리(SD) 등으로 확장하게 된다. 그룹사 ERP 고도화 프로젝트에서 이재진 웅진홀딩스 상무(CIO)의 가장 큰 고민은 MES, SCM 등 유관 업무 시스템과의 연동(데이터 통합)이다.
김기호 삼정KPMG 전무는 “확장과 연동은 ERP를 애플리케이션으로 접근하는지 플랫폼으로 접근하는지의 차이”라며 “연동 작업을 최소화하고 싶다면 플랫폼 관점에서 ERP를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만일 플랫폼의 개념에서 접근해 SCM, PLM, SRM, CRM 등을 동일 플랫폼을 이용하는 애플리케이션으로 도입한다면 인터페이스(EAI)가 아닌 통합(Integration)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상이한 플랫폼에서 운영되는 여러 애플리케이션의 조합으로 이뤄진다면 EAI와 같은 인터페이스 툴을 사용해 연동 프로젝트를 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김기호 전무는 “결국 인터페이스를 줄이기 위해선 애플리케이션이 아닌 플랫폼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비즈니스 플랫폼으로서 SOA ERP=기업의 ERP 구축 고민에 컨설턴트들과 ERP 패키지 업체들의 공통된 해결 방법은 ERP가 SOA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1년 ERP 구축 전략에 대해 컨설턴트들의 공통된 조언은 “ERP에 앞서 ERP를 위한 아키텍처를 점검하라”는 것이다. 세계 경제 및 정치 상황, 인수합병 등 여러 가지 변수를 언제든 발생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고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는 비즈니스 아키텍처로서 ERP를 구축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이를 위해서는 ERP 시스템의 아키텍처부터 점검해야 한다.
김이기 딜로이트컨설팅 이사는 “사업 존폐나 변화에 ERP가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는 SOA체계 도입과 같은 유연한 IT지원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즉 각 업무는 서비스로 정의되고 해당 업무를 가장 잘 지원하는 업계 최고의 애플리케이션이 해당 서비스를 지원해야 한다. 따라서 예전에는 하나의 패키지가 구매, 물류, 생산, 재무 등의 업무를 지원했다면 향후에는 다양한 회사의 모듈화된 패키지가 느슨한 형태로 통합돼 한 기업의 업무를 지원하게 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또 모듈 간의 통합은 ESB(Enterprise Service Bus)와 같은 툴로 실현될 수 있다. 이런 환경이 구축된다면 특정 업무가 비효율적일 때 모든 ERP 시스템을 다시 구축할 필요 없이 특정 서비스만 대체하면 되기 때문에 업그레이드 작업 시에도 훨씬 유리해진다.
사실 전문 컨설턴트의 전망과 지적은 ERP 패키지에서 이미 수용되고 있다. SAP의 비즈니스프로세스플랫폼(BPP)이나 오라클의 퓨전애플리케이션전략의 오라클 애플리케이션통합아키텍처(AIA)가 그것이다.
강우진 상무는 “ERP는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더 나아가 엔터프라이즈 아키텍처(EA)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다양한 시스템과 연동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오라클 AIA다.
이호신 SAP코리아 전무에 따르면 SAP ERP는 △컴포넌트(영업·생산·구매·회계 등) △엔터프라이즈 서비스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3계층으로 이뤄지고 이 중 엔터프라이즈 서비스 계층이 바로 SOA 서비스를 가능케 한다. 과거에는 개발에만 의지했던 개별 기업의 요구를 컴포넌트 계층의 표준 프로세스와 서비스 계층을 ‘융합’해 개발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것이다.
특히 SAP BPP의 경우 KTDS, 한국수력원자력, 삼성중공업 등이 적용하면서 BPP로서 ERP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SAP BPP의 백미는 다른 벤더의 애플리케이션이나 자체 개발 애플리케이션 등 non-SAP 애플리케이션도 CE(컴포지트 환경)라는 개발도구를 이용해 마치 SAP ERP의 모듈인 것처럼 인식시켜주는 것이다.
이성호 메타넷 이사는 “SAP BPP나 오라클 AIA의 진정한 혜택은 레거시 애플리케이션의 재사용성, 베스트 프랙티스에 기반한 기업 맞춤형 ERP의 빠르고 용이한 구축에 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ERP 패키지가 국내 환경의 특수성과 기업 고유의 운영 업무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기업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호 이사는 “하드코딩에 의한 추가 개발 작업이 아니라 세부 모듈을 업무 프로세스에 따라 조합(컨피규레이션)하는 것이 2011년 이후 ERP 커스터마이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비즈니스 프로세스 플랫폼으로서 ERP가 모든 기업에 다 동일한 효과를 주는 것은 아니다. 통신 서비스나 유통, 물류 기업 등 ERP가 전체 업무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을 때에는 제조기업에서처럼 극적인 효과를 보기는 힘들다.
김이기 이사는 “SOA 체계 하의 ERP는 업무를 지원하는 서비스의 집합체로 볼 수 있다”며 “따라서 ERP는 서비스의 구성요소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박현선기자 hspark@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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