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영화가 아니라 ‘예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지난 2006년 국내에도 개봉된 영화 ‘일본 침몰’ 얘기다. 영화는 일본 국토 아래 위치한 태평양판과 북미판의 충돌로 진도 10의 지진이 발생, 일본 내 대도시들은 화재에 휩싸이고, 발전소·교량·철도 등 국가 기반시설이 초토화되는 모습을 그린다. 설상가상으로 해변에서는 수십미터(m)의 해일이 순식간에 마을을 덮어버린다.
현실로 돌아와 지난 13일 규슈 지방 화산이 다시 분화했다는 뉴스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영화 역시 일본 후지산이 재분화하기 시작하면서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기 때문이다. 영화 일본 침몰은 이번 3·11 대지진을 예언한 것일까. 일본 열도는 정녕 바닷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는 중일까.
◇일본 침몰 시나리오, 원작은 1970년대=사실 지진에 따른 일본 열도 위기를 다룬 영화·소설은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지난 2006년 개봉된 일본 침몰도 197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의 리바이벌(재판)이다. 두 영화 모두 1973년 출간된 고마쓰 사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고마쓰 사쿄의 소설은 1년간 400만부가 팔릴 정도로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경제위기·오일쇼크 등의 외부요인이, 지진이라는 자연현상에 대한 일본인들의 두려움을 통해 반응했다는 분석이다.
◇영화 속 ‘메걸리스’ 이론, 과학적 근거는= 비록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지만 일본 침몰은 관객을 설득하기 위해 각종 장치들을 마련해 뒀다. 특히 영화 초반부를 이끌어 가는 게 ‘메걸리스(megalith)’ 함몰에 의한 일본 열도 붕괴현상이다.
메걸리스는 판 아래로 들어간 다른 판이 열과 압력에 의해 서로 뭉치고 축적되면서 테두리가 둥근 추 모양으로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영화에서는 북미판 아래로 들어간 태평양판 끝자락에 메걸리스가 형성된다. 일반 지각보다 무거운 메걸리스는 맨틀 아래로 가라앉고, 이때 북미판 끝에 위치한 일본 열도까지 같이 끌어내린다는 것이다. 마치 식탁보에 무거운 추를 매달면 식탁 위에 있던 접시·포크·나이프 등이 동시에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실제로 지난 2007년 일본 해양연구개발기구·도쿄대 등 공동연구팀은 메걸리스 붕괴를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한 바 있다. 연구팀은 지진파와 전자파를 이용한 지구 심층부의 구조 탐사, 슈퍼컴퓨터를 사용한 수치 시뮬레이션, 고온·고압 하의 암석실험 등 연구를 동시에 진행했다. 이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메걸리스의 형상이 조금씩 차이가 있음을 확인했다. 특히 이 연구로 붕괴된 메걸리스가 지각 아래 맨틀로 낙하한 뒤 쌓인다는 것이 시뮬레이션에 의해 재현됐다. 연구진은 “메걸리스는 주변의 맨틀 물질보다 차갑고 무겁기 때문에 자칫 지구 중력의 균형이 무너져 내릴 수 있다”며 “메걸리스 붕괴는 일본 침몰 정도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천재지변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화 일본 침몰은 또 특정 미생물에 의해 열도 붕괴현상이 가속화될 것으로 가정했다. 맨틀과 지각 사이에 메탄가스를 만들어 내는 박테리아가 폭넓게 번식하면서 다량의 메탄가스가 생성된다고 주장한다. 가득 찬 메탄가스는 지각과 맨틀 사이의 윤활유 역할을 하면서 태평양판의 이동 속도를 더욱 높이고 열도 침몰 시기도 크게 앞당긴다는 의미다.
생물종을 근거로 일본 침몰 이론을 제시한 학자는 실제로도 있었다. 이마무라 후미히코 도호쿠대학 교수를 비롯한 일본 지질학 원로들은 ‘사케가시라’라는 심해어가 근해에서 발견되는 현상이 대지진의 전조라고 주장했다. 지난 2005년 3월 20일 후쿠오카에서 강도 7.0의 대지진이 발생하기 전 비슷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화 속 판 충돌 양상, 실제와 달라=비록 각종 정황들이 일본 침몰의 증거로 거론되지만 실제로 일본 열도 전체가 침몰할 것이라는 데에는 반론이 우세하다. 태평양판이 유라시아판을 파고들어가는 각도가 비교적 낮은 ‘저각도 섭입(攝入)형’이라는 이유에서다. 저각도 섭입형 판 위에 놓인 지각은 가라앉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솟아오른다.
영화에서처럼 지각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위해서는 마그마 열기둥인 ‘맨틀플룸(mantleplume)’이 형성돼 지각이 늘어나면서 얇아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주로 해양판이 급한 경사를 이루며 대륙지각 아래로 들어가는 ‘고각도 섭입형’에서 생긴다. 동해의 깊은 수심은 약 1700만년 전 바로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지만 일본 열도에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결국 섬 전체가 침몰한다는 것은 지질학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앞선 메걸리스에 의한 지각변동 시뮬레이션도 대지진의 근거는 되지만 열도 침몰까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영화는 영화일 뿐, 오해하지 말자”=영화 일본 침몰은 과학적 현실이 이와 같으니 미래의 위기에 대비하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 대재앙 앞에 우왕좌왕하는 군중, 그들을 구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관료들, 그러나 그 속에서 피어나는 휴머니즘을 그린 ‘신파’에 가깝다. 원작 소설이 나온 1970년대는 일본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인간성이 상실되고 군중이 절망에 빠져있던 시기다. 1980년대 찾아온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 닥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메걸리스 이론과 침몰에 이르는 시나리오는 절망적인 상황을 그리기 위한 ‘양념’으로 보는 게 맞다.
안석현기자 ahngija@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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