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제 것처럼 딱 맞아 더욱 슬픈 냄비를 투구랍시고 머리에 올린 후 유년시절 병사놀이를 연상케 하는, 그러나 알고 보면 집안 대대로 내려오고 있는 갑옷을 입고 쓰러져있는 이 노인을 보고 있자면 당연한 연민과 동경이 인다. 사실 돈키호테와 이순재라는 이름만으로 이미 게임은 끝났다.
우리가 처음 돈키호테를 만났을 때의 당혹감과 경이감을 생각한다면, 더불어 한국의 노장 이순재가 이뤄낸 연기역사를 되새긴다면 게임이라는 단어가 불경하게 들리겠지만 그들의 완전한 승리와 기쁘도록 참혹한 우리의 패배를 설명하기에 게임만큼 명쾌한 단어도 없다. 다시 말하면 ‘게임이 되지 않는 게임’이었다고나 할까.
흔히들 스페인문학을 압축하면 ‘돈키호테’가 되고 ‘돈키호테’를 확장하면 스페인문학이 된다고 말한다. 시대를 초월해 매번 다양한 관점에서의 해석과 분석이 가능한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시대에 따라 우스꽝스러운 미치광이로, 신념을 실천하는 영웅으로, 되찾아야 할 정신 등으로 읽혔다. 시대가 바뀌어도 새로운 해석이 되는 이 누더기 영웅은, 그러나 영웅이 될 수 없는 슬픈 얼굴의 기사일 따름이다.
따지고 보면 이 소설은 비극의 형태를 띈다. 비극이 될 수 없는 돈키호테의 행위는 이성과 광기, 꿈과 현실, 환상과 실재, 진실과 거짓 등 대립적 관계를 포괄하는 영역에서 이뤄진다. 여기서 광기는 그동안의 문학에서 보였던 천재성에서 비롯된 영웅적 광기가 아니다. 쇠락한 개인의 정신착란일 뿐이다. 이전의 광기가 운명적 숭고함과 신의 재능 등으로 대변되는 반면 ‘돈키호테’에서는 신의 위치가 흔들리고 개인의 광기는 오로지 개인의 것으로만 치환되면서 ‘미친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더 이상 낭만적인 돌발성이 미화되지 않는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추상적 옳음이 아닌 현실적 삶이다. 정의의 입장에서 모두 옳은 행동만을 취하는 돈키호테는 나름대로의 존재 이유를 가질 수 있음에도 더 이상 그것이 통용되지 않는, 시대의 슬픔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돈키호테의 삶을 절망이나 실패로 보지 않는다.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돈키호테’ 역시 보이지 않는 승리를 거둔 그를 표현하는 데 있어 소홀하지 않았다.
기나긴 여정만큼이나 다양한 에피소드를 갖고 있는 원작 중에서 이 연극은 네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취한다. 다양한 계층과 신분들이 모여 있음에도 수직이 아닌 수평적 관계로 바라보고 있는 돈키호테의 평등사상이나 자유에 대한 신념 외에 결혼관과 여성상의 모습도 잘 드러난다. 남장을 하고 숲속에 숨어있는 도로시아의 모습, 잃은 사랑에 대한 일종의 반항과 안타까움으로 하인과 함께 길을 떠난 루신다는 상당히 근대적 여성들로 묘사된다. 여기서 돈키호테는 각자 제 방법으로 엉킨 실타래를 푸는 네 남녀의 고군분투를 응원하며 위로한다. 주인공이자 조력자인 것이다. 연극 ‘돈키호테’의 작은 주제이자 이 연극이 껴안은 또 다른 미덕은 결국 ‘사랑’이다.
무대에는 환상과 현실이 공존한다. 그곳에는 스페인적 태양과 바람, 어떠한 황량함과 고독함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꿈이 있다. 이미 여러 번 읽고 듣고 보아왔기에 관객이 느끼는 감정의 굴곡이 완만한 편임에도 슬픈 얼굴의 기사가 주는 희망을 읽기에 무리는 없다. 지금, 아직도 돈키호테적 사람들이 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자신의 상상을 기반으로 세계에 도전하는 개인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위해 오늘의 돈키호테는 고향으로 돌아와 삶을 마감하는 대신 또 다른 모험을 떠난다.
뉴스테이지 이영경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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