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몇 가지 전형(典型)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정부 조직 개편이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어김없이 통과의례처럼 정부 조직을 개편했다. ‘문민정부’도 이 틀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정부조직을 개편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직개편이란 크건 작건 조직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자기증식 능력이 뛰어난 관료 조직이나 문화를 바꾸는 일은 심하게 말해 내전과 다를 바 없다.
부처마다 생사가 걸린 일이니 로비나 암투가 치열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조직개편 과정에서 파열음이 나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자연스런 일인지도 모른다.
김영삼 대통령은 특유의 추진력과 돌파력으로 조직 개편을 재임 중 4번이나 단행했다. 그런 그도 3차 조직개편을 앞두고는 더 이상 조직개편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세계화 구상을 발표하면서 사상 최대폭의 정부조직을 개편했다.
문민정부는 변화와 개혁을 통한 ‘신한국 창조’를 기치로 내걸고 출범했다. ‘신한국 창조’라는 슬로건은 이명현 서울대 교수(교육부장관 역임)가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문민정부의 목표는 세계화와 지방화, 정보화, 통일시대에 대비해 ‘작고 강력한 정부’를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김 대통령은 후보시절 선거공약으로 “간소하면서도 능률적인 정부를 구현하기 위해 학계와 재계 등 민간 전문가들로 행정쇄신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제시했다.
김 대통령은 “국민의 불편을 과감하게 제거하는 행정을 운영하겠다”며 취임 후 대통령 자문기구로 행정쇄신위원회를 구성해 초기부터 변화와 개혁 조치를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 일부는 행정쇄신위원회에 대해 사상 유례가 없는 국민편익을 위한 기구로 ‘특허감’이라고 극찬했다. 실제 유명무실한 위원회가 역대 정권마다 적지 않았던 게 사실이나 행정쇄신위원회는 의결기관의 역할을 하면서 각 분야의 행정쇄신을 주도했다.
4월의 하늘은 맑았다.
1993년 4월 20일. 김영삼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대통령 자문기구인 행정쇄신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위원장을 서울대 행정대학원 박동서 명예교수가 맡았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와 원장, 한국정치학회와 행정학회장을 지낸 행정학의 대가였다. 그는 한국 행정학 분야를 개척한 1세대다. 행정학 분야의 첫 학술원 회원이었다. 그는 2006년 6월 타계했다.
행정쇄신위 1기 위원은 학계와 연구기관, 기업, 언론계, 종교계 등 각계 인사 15명으로 구성했다. 위원은 김안제 한국지방행정연수원장, 김광웅 서울대행정대학원장, 김재철 동원산업 회장, 김영환 한양증권 상무, 노정현 연세대 교수, 박상규 중소기업협동조합 중앙회장, 배병휴 매일경제 논설주간, 박영철 금융연구원장, 박정희 서울YWCA 회장, 박종근 한국노총위원장, 인명진 목사(경실련 부정부패추방본부장), 최동규 전 건설부 장관, 황용주 중앙대건설대학원 교수, 황인정 한국개발연구원장 등이다.
김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박 위원장 등에게 차례로 임명장을 준 뒤 각별히 당부했다.
“행정쇄신 없이 정부의 경쟁력이 생길 수 없고, 우리나라가 더 발전할 수 없습니다. 학자의 양심에 따라 소신 껏 최적의 정부 조직 개편 시안을 만들어 주십시오.”
박 위원장도 취임후 가진 기자 회견에서 앞으로 활동 방향을 밝혔다.
“일선 행정 서비스 향상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조직개편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곧 행정 쇄신과 더불어 조직개편안도 다루겠다는 의미였다. 실제 행쇄위는 조직개편보다는 행정 쇄신에 역점을 둔 활동을 했다.
박 위원장은 업무처리와 관련해 “만장 일치가 가장 좋겠지만 어려우면 다수결로 안건을 채택하겠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위촉장을 위원들에게 준 후 위원들과 칼국수로 오찬을 함께 했다.
박 위원장은 이어 1차 전체 회의를 열고 정부 내의 각종 불합리한 법령과 제도개선, 정부조직개편 방안 연구 등 위원회 운영 방침을 논의했다.
쇄신위는 이날 부조리와 부정소지를 차단하고 국민의 실질적 편익을 증진시킬수 있는 과제를 선정해 이에 대한 쇄신방안을 마련해 대통령에게 건의키로 했다.
쇄신위는 기본 방향으로 1. 국민 편의를 우선한 제도와 관행의 쇄신 2. 민주적이며 효율적인 행정 구현 3. 깨끗하면서 작고 강한 정부 구축 등에 뒀다.
이런 기본 방향에 따라 1. 규제완화 2. 지방 분권화 3. 행정 관행과 행태 개선 4. 예산 조세 등 경제적 개선 5. 행정 조직 개편 등에 관한 과제를 수행하기로 했다.
위원 인선과 관련한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의 증언.
“행정쇄신위원회 인선에는 내가 적극 개입했어요. 처음 안에는 행정전문가들로 구성을 했어요. 그래서 민간인을 3∼4명 포함시켰어요. 행정 수요자인 국민의 의견이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일부에서 내가 행정쇄신위를 주도한 것처럼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2001년 펴낸 자신의 ‘회고록’에서 박 위원장 발탁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나는 박 위원장에게 정부 조직개편 시안(試案)을 만들 것을 주문했다. 서울대 교수였던 그에게 위원장을 맡긴 것은 그가 행정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가장 권위자였을 뿐 아니라 대단히 정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은 행정쇄신위원회 활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소신껏 일할 수 있게 제도적인 뒷받침을 했다. 먼저 위원회를 실질적으로 보좌하는 실무위원회(위원장 총리행정조정실장)를 구성하고 행정 행태와 관행 개선, 조직개편 등 분과위를 구성했다. 이런 조직은 행정쇄신위원회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위원회가 3심제(三審制)로 쇄신안을 결정하면 곧장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각 부처별로 집행하게 했다. 자문기구로 출발했지만 실제는 의결기관이나 다를 게 없었다. 김 대통령의 대단한 배려가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쇄신위의 활동에 신뢰를 보냈다. 나중에 총리실에서 부처별로 개혁사례에 대한 추진 실태를 점검하기도 했다. 쇄신위는 정부 어느 부처보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청와대는 김양배 행정수석실에 행정쇄신비서관을 두었다. 이 조치도 파격이었다. 김 행정수석은 내무관료 출신으로 광주시장과 전남부지사를 지냈고 후에 농림수산부장관과 보건복지부장관을 역임했다. 쇄신안은 해당 부처로 내려보내 즉각 후속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초대 행정쇄신비서관은 김덕봉씨(현 고려대 교수) 였다. 그는 청와대 정책2비서관, 국무총리 공보수석 등을 지냈다.
쇄신위는 출범과 동시에 조직개편연구반을 구성해 정부 조직개편안을 마련했다. 위원회가 만든 안은 3가지였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A위원의 회고.
“대폭안과 중폭안, 그리고 소폭안을 만들었습니다. 은밀히 안을 만들었지만 비밀유지가 한두 사람이라면 몰라도 각계 인사들이 모여 논의를 하다보니 안 새나갈 리가 없었습니다. 관료 조직은 정보력이 대단합니다. 내부에서 논의한 내용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정말 놀랐습니다.”
물밑에서 검토한 조직개편안이 6월경부터 슬금 슬금 흘러나가자 공직사회가 차츰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시 마련한 대폭안의 내용은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하고, 교통과 체신, 건설, 보사, 노동, 과기처 등 6개 부처를 통폐합하며 1∼2개 부처를 신설한다는 구상이었다. 중폭안은 건설, 과기 등 2∼3개 부처를 통폐합하는 안이었다. 마지막이 15개 부처 간 업무 기능을 조정하는 소폭안이었다.
또 다른 B위원의 회고.
“조직개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하는 경제부처 개편 방향이었습니다. 경제기획원이 한국 경제 발전을 주도한 공로가 있지만 문민정부가 표방하는 개방화 시대에 정부조직과 기능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지요.”
다른 안은 산업전반을 총괄하는 대부처 성격의 산업기술부나 혹은 산업부의 탄생이었다는 것.
상공자원부의 산업정책과 농림수산부의 기능, 과학기술처와 체신부의 정보통신과 과학 분야를 합친 대형 부처를 만들자는 의견도 나왔다. 이와 함께 과기처와 체신부의 정보통신 분야만 따로 떼어내 상공자원부와 별도의 독립된 부처를 만들자는 안과 건설부와 교통부, 환경처와 노동부를 합치자는 주장도 나왔다고 한다.
다른 C위원의 증언.
“정부 조직을 개편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내무부의 지방통제 기능도 축소했습니다. 갈등과 저항이 거세고 로비와 역공작이 난무했습니다. 지연, 학연, 혈연 등을 이용해 자기 조직 보호를 위해 접근해 오는데 그것을 피할 도리가 있습니까.”
문민정부는 그해 8월 12일 금융실명제 등을 발표하면서 조직 개편은 다소 늦추기로 했다. 김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언급한 내용.
“1993년 6월경 정부 조직개편 구상이 흘러나오자 개편 대상으로 지목됐던 경제기획원과 내무부 등의 관료들이 치열하게 로비를 벌였다.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에는 실명제 정착을 위해 또 다시 개편을 연기해야 했다. 취임 첫해 부정부패 척결과 사정(司正)이 높은 강도로 진행되면서 공직 사회의 복지부동이 한창 문제가 되었고, 경제사정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쉽지만 일단 정부 조직개편을 연기하기로 했다.”
5년간 위원으로 활동한 인명진 목사의 회고.
“로비가 치열했습니다 하지만 박동서 위원장과 저한테는 그런 로비가 없었어요. 저야 재야 운동 한 사람이니 학연이니 지연이니 혈연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신 껏 국민편에서 문제를 제기했어요. 행정에 관해 저는 비전문가입니다. 하지만 감옥에 4번이나 갔다 오고 서민과 부딪치며 살다보니 국민의 가려운 곳을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인 목사는 이후 각종 정부위원회에 참여했고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역임했다. 지금은 서울 갈릴리 교회 목사로 목회를 한다.
그가 말하는, 이기주의의 일단을 엿볼수 있는 일화.
“그 당시 교정국장을 검사들이 차지했어요. 그래서 내가 교정국장은 교정공무원이 맡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어요. 그랬더니 검사들이 난리를 쳤어요. 결국 교정국장에 교정공무원 또는 검사를 보임하도록 한다고 수정했지요. 그래놓고도 검사들이 교정국장직을 오랫동안 맡았어요.”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개편하는 데엔 이견이 없었다. 행정쇄신위원회는 정보통신부 확대개편은 정보화 사회로 이행을 촉진하는 과정이라고 판단했다.
행정쇄신위는 우선 “국가경쟁력강화와 관련해 정보화 의미는 다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면서 “앞으로 정보화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고 기능영역의 발굴, 정부와 민간 부문의 정보망 연계 체제 강화, 정보화 사회 진입을 가로막는 규제와 제도상의 문제점을 분석해 대책을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박동서 위원장은 1999년 펴낸 ‘한국행정의 쇄신사례’에서 정보통신부 제안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정보통신부 제안은 단순히 정보화 추세에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정보화를 촉진하기 위해 보다 많은 관련기능을 타기관에서 넘기는 것으로 돼 있었으나 마지막 직제개편 시 아쉽게도 넘기기로 한 기능을 다 찾아가지 못했다.”
그는 훗날 정부조직개편안이 확정된 후 당초 만든 안의 80% 정도가 반영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초 안보다 후퇴한 정보통신부 기능에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지상파 방송이 정보통신부로 넘어오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행정쇄신위원회는 매주 회의를 열고 정부가 수십년간 손도 안댄 각종 규제를 시원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실제 국민고총처리위원회 도입과 규제 사전 심의제, 소비자 권익보호 등 국민편익과 산업안전, 복지 등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체신 행정 중 우편판매와 전화, 통신, 우편취급, 아파트 등 공동주택내 우편반송함 설치 등을 개선했다.
체신금융 업무 개선과 관련한 박승규 체신부 환예금과장(강원체신청장, 한국인터넷진흥원장 역임, 한국정보통신기능대학장)의 기억.
“은행과 우체국의 전산망이 연결되지 않아 자금의 송금이나 인출 등에 불편함이 많았습니다. 이를 은행망과 연결시켜 달라고 수차 재무부에 요청했으나 안들어 주는 겁니다. 그래서 행정쇄신위에 올렸더니 이를 연결시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준비 등으로 인해 시행은 몇 년 후부터 했습니다.”
청와대 행정쇄신비서관실에서 행쇄위업무를 담당했던 심재민 행정관(광주광역시장 권한대행,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상임위원 역임)의 말.
“당시 주된 업무는 위원회가 처리할 안건 등을 검토하고, 대통령께 보고할 추진실적을 비서관, 수석비서관에게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하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위윈회가 한 두 번 회의하고 일하는 시늉만하다가 유야무야 하는 것과 달리 행정쇄신위원회는 아마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국민편에 서서 일했다고 확신합니다.”
인명진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쇄신이나 개혁은 전문성이나 지식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고자 하는 의지의 문제입니다.”
행정쇄신위원회는 문민정부 5년간 매주 회의를 열어 모두 2500여건의 쇄신과제를 처리했다. 그리고 1998년 2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IT칼럼니스트 hd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