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세상] 영화의 길, 만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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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개봉했다. 1995년 성인만화잡지 ‘투엔티세븐’에 연재를 시작했으니 15년 만의 일이다. 박흥용 작가는 데뷔 이후 약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깨달음의 화두를 작품에 담아내려했다. 약한 이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실존인물 이몽학에서 시작한다.

박흥용은 초판 작가의 말에서 “시대, 계급, 환경 등에 있어 매우 불리한 상황에 놓여졌던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려는 몸짓을 그린 이야기다”라고 만화를 설명한다. 이 문장만으로 판단하면, ‘변혁의 길’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길은 영화가 집중한 이몽학의 길이다. 그러나 만화는 ‘변혁의 길’이 아니라 ‘깨달음의 길’을 걷는다. 벗어난다는 것이 지닌 또 다른 의미를 찾아간다. 이 길은 ‘황정학의 길’이다.

영화는 혁명의 길, 이몽학의 길을 선택했다. 영화의 길이 만화의 길과 다르다는 말이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많은 영화가 만화와 다른 길을 걷는다. 문제는 선택이다. 이준익 감독은 시대, 계급, 환경이라는 동일한 출발점에서 깨달음의 길이 아니라 변혁의 길을 걸었다.

다른 길을 걷다 보니, 만화에서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선조 대왕이 꽤 비중있게 등장한다. 김창완이 보여준 비열한 선조의 모습은, 지금까지 어떤 사극에서도 볼 수 없었던 임금의 모습이다. 오로지 당론이 우선이고, 내가 살기 위해 너와 다른 길을 걷겠다는 동인과 서인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낸다. 선조의 모습이나 동인, 서인의 모습은 역사적 풍자에 당대적 풍자가 합쳐진 모습이다.

여기에 야심가 이몽학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원작에서 이몽학은 견자에게 진정한 깨달음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한 역롤모델이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이몽학의 길을 걸어서는 안된다는 것. 하지만 영화는 오히려 이몽학의 길을 진지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황정학은 그 길을 막기 위해 나선다. 또 원활한 대결 구도를 만들기 위해 원작에서는 ‘나이 오십이 되도록 공부해서 생원 진사시에 겨우 합격하고 할 일을 찾지 못해 어슬렁거리는 촌부’에 불과했던 견자의 아버지를, 서인의 우두머리로 만든다. 원작에서 아무 존재감 없던 아버지가 영화에서는 견자에게 꿈이 없다는 화두를 던져준다.

출발선은 시대, 계급, 환경으로 같지만 가는 길은 전혀 다르다. 그러니 이야기도 전혀 달라진다. 황정학과 견자의 유쾌한 수련 과정은 단지 황정학이 길을 걸으며 견자의 뒷통수를 때리는 코믹 에피소드로만 정리된다.

원작에서 황정학이 죽고 나서 무덤을 지키는 견자에게 이몽학이 찾아온다. 이몽학은 “운명소식을 듣고는…막막했습니다. 갚을 은혜가 한둘이 아닌데…”라고 말한다. 견자와 이몽학 사이에 긴장이 잠시 흐른다. 그러나 그것은 원수의 대립이 아니라 칼을 든 사람으로, 둘의 긴장관계다. 그리고 견자는 자신의 한계와 마주한 뒤 자유를 얻는다.

영화가 만화와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두 매체는 다른 길을 걸었다. 개인적으로는 만화가 걸어간 길이 더 좋다. 그래서 만화 보다 먼저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 enterani@c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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