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제 약대 입시에 취한 이공계

입문시험 준비 열중…기초 과학 공동화 우려

관련 통계자료 다운로드 6년제 약학대학 입시 개요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화학부 김병문 교수의 ‘유기화학’ 강의실엔 생명공학 전공 학생들이 예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었다. “늘어난 학생들의 대부분이 ‘약학대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얼마전 ‘한국과학상’을 수상한 윤경병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요즘 자신이 마치 ‘교수’가 아닌 입시학원 ‘강사’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약학대학 진학을 위해 입시 준비에 몰두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의학·치의학전문대학원에 이어 오는 8월 6년제 약학대학 운영에 따른 ‘약학대학입문시험(PEET)’의 첫 시행을 앞두고 화학·생명공학·물리 등 대학의 기초과학 전공 학부가 황폐화하고 있다. 정부가 타 전공 학생들의 약대 편입과 입시 과열을 완화하기 위해 도입한 ‘2+4년제’가 자연과학 분야의 공동화 현상은 물론 대학생 사교육 시장의 확대, 반도체·LCD 등 주력 응용산업의 경쟁력 약화라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06년 1월 고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해 ‘2+4체제’약학대학 입학 시스템을 확정했다. 전공과 상관없이 2년의 학부 과정을 거친 학생이 약학입문자격시험(PEET)을 통해 약학대학에 입학해 4년 뒤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게 한 제도다.

시행도 하기 전에 기초과학 학부 학생들이 PEET라는 입시에 매달리고, 썰물처럼 약대로 빠져나갈 조짐이 뚜렷하다. 그 빈 자리를 다른 대학 출신의 편입생이 채우는 ‘도미노 현상’도 예상됐다. 윤경병 교수는 “수도권 주요대학의 기초과학 대학원생의 숫자가 줄어들자 이를 지방대로 채우고 안되면 동남아에서 우수 학생을 유치하는 사례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아예 2년 뒤 약학대 진학을 염두에 두고 PEET시험에 유리한 화학·생명공학·물리학과를 선택하겠다는 움직임까지 있다. 지난 2003년 시행 이후 학부 생명과학 관련 졸업생들을 빨아들인 의·치학전문대학원의 현상과 비슷한, 오히려 더 심한 상황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한화학회(회장 도춘호)가 지난해 2학기 서울대 등 전국 주요 16개 대학의 화학계열 1·2학년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가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 2학년의 14%, 1학년의 31%가 약대 진학을 준비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의학·치학 전문대학원에 따른 기초과학 공동화 현상은 이미 현실로 나타났다. 노정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서울대·KAIST·포스텍의 지난 10년간 생명공학계열 학부 졸업생의 동일계열 대학원 진학률은 2002년 평균 57%에서 2010년 초 16%로 급감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전국의 화학관련 학과장들은 지난해 11월 대책협의회까지 결성했다. 하지만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 이공계에 비해 약대나 의대 진학이 평생 안정적이고 대우받는 직장을 보장해준다는 사회적 인식이 워낙 팽배하기 때문이다. 화학·생명공학 분야의 기초 연구가 무너지면 우리나라 경제를 떠받치는 LCD·반도체·전지·의학·녹색 산업의 경쟁력도 약화될 게 불보듯 뻔하다. 정부가 자연과학 진흥을 위한 특단의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허남회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학생들이 대학 등록금과 맞먹는 학기당 500만원짜리 PEET 입시학원에 등록, 관련 대학 사교육 시장도 급팽창하는 실정”이라면서 “화학 관련과 졸업생과 약사가 벌어들이는 수입에 큰 차이가 없는 데도 불구, 사회적 인식이 학생들을 약대 입시로 내몰고 있다”고 꼬집었다.

박주호 교육과학부 대학지원과장은 “대학들의 입장도 일리가 있지만 2+4 학제를 시행하는 첫해인 만큼 기존에 시험을 준비해온 학생들을 고려해서라도 당장 제도를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