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행시 25회, 기술고시 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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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위가 조금 풀린 탓인가. 유명을 달리하는 어르신이 많다. 임상규 옛 농림부 장관이 최근 어머니를 여의었다. 지난 25일 문상을 간 곳에서 오랜만에 기술고시 17회 출신 고위공무원인 A를 만났다.

 “교육 다녀왔는데… 자리가 정해지지 않아서 명함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무어라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A가 애초 공직생활을 시작한 중앙행정기관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본부 외곽과 다른 부처로 옮겨다녔던 터라 섣부른 위로를 전하기 어려웠던 것.

 27일에는 빙모를 여읜 박영일 옛 과학기술부 차관을 조문했다. 반가운 얼굴들과 해후한 가운데 또 다른 기시 17회 출신 고위공무원 B의 소식을 들었다. 이명박 정부 조직개편 과정에서 여러 곡절을 겪은 끝에 지금은 고용 휴직 상태였다.

 기시 17회는 1982년 임용돼 28년째 공직에 있다. 아직 이른바 ‘1급’ 고위공무원이 나오지 않았다. 밝음과 어두움은 교차하기 마련인가. 기시 17회와 같은 해 공직에 발을 들인 행정고시 25회의 상황을 손가락에 꼽아보았더니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이명박 정부에서 ‘행시 25회’의 무게가 상당하다. 주요 중앙행정기관 15부 3위원회(국민권익위원회는 중앙행정기관이 아님) 가운데 1급 상당 기획조정실장이나 사무처장을 맡는 이가 7명이나 된다. 김차동(교육과학기술부), 김호년(통일부), 곽영진(문화체육관광부), 최형규(농림수산식품부), 이채필(노동부), 이기주(방송통신위원회), 김주현(금융위원회) 등이다.

 장·차관과 정무직 위원을 뺀 국가 주요 행정조직의 맏형 열에 서넛(38.8%)이 25회라는 얘기. 외교통상부(외무고시)·법무부(사법시험)·국방부(군인)를 빼면, 열에 네댓(46.6%)에 이른다. 이들의 책상 위에 기관별 기획재정·행정관리·규제개혁법무·국제협력 관련 업무가 오른다. 정무직(장·차관급)은 아니나 시장 경쟁 정책을 수립하고, 기업을 규제하는 공정거래위원회 최고 의결회의에 참여하는 김학현 상임위원도 행시 25회다. 정부 입법·예산 작업은 물론이고 중요 의사결정에 그들의 입김이 닿고, 손길이 머무는 셈이다.

 기획조정실장과 어깨를 견주는 기관별 정책실로 시선을 옮기면 그들의 힘을 더욱 절감한다. 박현출 농림부 식품산업정책실장, 안현호 지식경제부 산업경제실장, 조석 지경부 성장동력실장, 장옥주 복지부 아동청소년가족정책실장, 서병조 방통위 방송통신융합정책실장 등 국가 주요 산업 규제·진흥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행시 25회가 있다.

 이처럼 기시 17회와 행시 25회 형편이 사뭇 다르다. 물론 행시 25회가 모두 흥하고, 기시 17회 전체가 쇠퇴한 것은 아니되 ‘단단한 행시 순혈주의’를 향한 시선이 곱지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 단단한 결속과 무게로 서로 밀고 끌어주며 정무직을 향해 나아가되 국민을 섬기는 공직자 본연의 모습을 잃지 말기를 두 손 모아 빈다. 특히 참여정부에서 ‘혁신’ 바람을 탔고, 지금은 ‘녹색’ 바람을 받으려 돛을 돌리는 게 고위공무원의 숙명이자 본분이나 출세에 눈 멀어 국민을 내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이은용 국제팀장 ey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