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이든 DVD든 제작자나 판매자는 제값을 받고 싶고, 사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싸게 구입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법치국가에서 개인의 노력과 창의성은 적정한 대가를 요구한다. 해적판 음반이나 DVD가 범죄인 이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해적판 음반과 DVD가 사라지길 기대하긴 어렵다. 오히려 개인의 소비 심리와 이를 부추겨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들의 이기심은 불법 복제 CD와 DVD 시장의 규모를 점점 키우는 추세다.
대부분 개발도상국에 머물고 있는 남미 국가들은 해적판 CD·DVD에 대한 선진국들의 규제에 아직 무관심한 편이다. 남미 지역에서 해적판 복제물을 양산하는 상인이나 소비자 대부분이 물건을 주고받는 광경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물론 남미에도 예술가나 프로그래머가 다수 있다. 저작권이 있는 개인이나 회사 입장으로서는 남미의 상황에 분통 터질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나는 해적판 복사본이 대량 유통되고 있는 파라과이의 델 에스테를 먼저 둘러봤다. 이곳에서는 대개 음반 CD가 MP3의 형태로 상당수 복제되고 있다. 비용은 CD 한 장당 파라과이 돈으로 5000과라니(1달러가량)에 거래된다. CD 한 장에 들어갈 용량의 음반이라면 적어도 수십 곡은 담을 수 있다. 음반업자나 가수 입장에서는 정말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다.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경우 가격은 2달러 선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품 가격에 비하면 껌 값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제작된 해적판 복사본들은 다양한 경로를 거쳐 이웃 브라질의 대도시인 상파울루·리우데자네이루 등지로 흘러 들어간다. 이곳으로 유입된 해적판 제품들은 지역 내 소비자들에게 팔리거나 다시 복제판을 만들어내는 데 이용된다. 해적판 CD와 DVD의 운반 경로를 따라 나는 다시 상파울루에 있는 음반·소프트웨어 유통 시장을 찾았다.
상파울루 중심부에 위치한 산타 이피제니아 거리. 이곳은 전자·전기·통신·IT제품의 유통 상가로 유명하다. 평일 낮에는 넘쳐나는 인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이 붐빈다. 그 비좁은 거리지만 조금이라도 여유 공간이 있는 곳이면 해적판 복제 CD와 DVD 판매상들이 판치고 있다. 이곳은 음반보다는 게임과 소프트웨어가 주로 유통된다. 한 가판대에서 최신판 ‘코렐드로(CorelDraw)’의 가격을 물어봤다. 브라질 헤알화로 10헤알을 달라고 한다. 5달러선이다. ‘포토숍(Photoshop)’을 물어 봤더니, 역시 10헤알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어떤 소프트웨어를 찾느냐고 묻는다. ‘플래시’ 최신판과 ‘윈도XP SP3’를 물었더니, 10헤알만 내면 찾아 주겠다며 좀 기다리란다. 흥미로운 모습은 이 판매상들이 단속은 고사하고 주변의 시선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법 복제판을 버젓이 팔고 있는 광경이 일상처럼 돼 버린 분위기다.
이런 모습은 불법 음반과 영화를 주로 취급하는 ‘25 지 마르소’ 지역이나 ‘헤푸블리카’ 인근 상가도 마찬가지다. 보행자 전용 도로를 메울 정도로 가판대를 세워놓고 온갖 종류의 해적판 CD와 DVD를 판매하고 있다. 주변에 경찰들이 있긴 하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분위기다. 단속 기간이 아니면 경찰들조차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브라질 최대 주간지인 ‘베자(VEJA)’가 지난 2009년 8월 12일자에 해적판 CD 및 DVD 실태를 보도한 바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영화 DVD의 경우 전 세계 시장에서 불법 복제판이 차지하는 비중은 48%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브라질 내에서는 해적판 비중이 50% 정도로 전 세계 평균보다 다소 높은 편이다. 하지만 음반 시장은 사정이 다르다. 전 세계 해적판 제품 비중이 20%인 데 비해 브라질에서는 무려 82%를 불법 복제가 차지하고 있다. 사정이 이쯤 되면 경찰은 물론이고 세무 직원들에게도 노여움을 살 만한 수준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브라질의 규제 당국에서는 이들 해적판 복제물들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를 요구하는 일이 잦다. 또 감독 기관들은 불법 복제품 생산자나 판매자, 심지어 소비자들에게까지 실제로 제재를 가하려는 움직임이다. 현행 브라질 법으로는 해적판 복제품 생산자는 1년 이하, 판매자는 3개월 이하의 징역에 각각 처할 수 있다. 하지만 불법 복제품을 소지한 이들에게는 특별한 제재가 없었다.
이에 대해 상파울루 시경은 조직 범죄 조사기관(DEIC)의 협조를 얻어 더욱 강화한 법적 제재 조치를 요청하고 나섰다. 불법 복제에 관한 한 최소한 단속 실적이라도 올리겠다는 의도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생산자와 판매자는 물론이고 해적판 복제물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처벌받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좀 더 강화된 법 규제가 시행되면 불법 복제물이 남미 거리에서, 아니 브라질 내에서만이라도 사라질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듯하다. 종전의 다른 법들처럼 시간이 흐르면 또다시 불법 복제의 폐해에 대해 둔감해지면서 실효성을 잃을 수도 있다.
더 큰 문제점은 라틴 아메리카 국민의 의식 구조다. 2009년 11월 26일자 파라과이 일간지인 ‘ABC’는 조사를 통해 불법 복제물과 가짜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를 보여줬다. 이 조사에 따르면 무려 74%에 달하는 국민이 가짜나 불법 복제물이 자신들의 생활 형편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응답자 가운데 80% 이상이 불법 음반 CD나 영화 DVD를 구입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 정도면 파라과이 국민의 절대 다수가 불법 복제물을 보편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비록 단편적인 예일지 모르지만, 이런 의식 구조가 사라지지 않는 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불법 복제물이 퇴출당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불법 복제가 저작권을 가진 이들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분명한 원칙을 감안하면 언젠가는 없어져야 할 범죄임이 마땅하다. 따라서 앞으로도 라틴 아메리카의 정부과 규제 기관들은 이런저런 다양한 정화 노력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 해도 과연 라틴 아메리카에서 불법 복제물이 자취를 감추게 될 날이 올 것인가. 쉽지 않아 보인다.
상파울루(브라질)=박소현
세계와 브라질 블로거 infoiguass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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