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의 작품 ‘미저리’에서는 한 작가의 작품에 너무도 몰입한 나머지 그 작가를 납치, 감금하고 심지어는 움직이지 못하게 다리를 부러뜨리면서까지 자신만을 위한 작품을 완성해주기 바라는 팬이 등장한다. 토니 스콧 감독의 ‘더 팬’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슈퍼스타를 위해 살인까지 불사하는 팬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나 선수에게 팬이라는 ‘대중’은 때때로 무서운 존재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팬이 이처럼 두려운 존재로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산다고 볼 수 있는 작가나 선수, 또는 작품 등에 팬은 그들의 성장과 발전을 지원하는 서포터기도 하다. 팬이 없다면 그 어떤 사람도, 작품도 살아남지 못하며, 열성적인 팬은 때때로 완전히 몰락한 작품마저도 살려내기도 하니 말이다.
미국과 일본을 각각 대표하는 SF시리즈인 ‘스타트렉’과 ‘기동전사 건담’은 열광적인 팬에 의해 살아난 작품들이다. 양쪽 모두 시청률이 높지 않아 조기 종영한 작품이지만, 이들을 지지하는 팬의 성원으로 다시 부활했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두 나라를 대표하는 시리즈물로 당당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스타트렉의 재방영을 바라며 무수한 엽서 세례를 보냈던 팬들이 없었다면 ‘스타트렉’이 21세기도 한참이 지난 지금 영화로 다시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새벽부터 극장 앞에 진을 치며 ‘기동전사 건담’의 방영을 기다린 팬들이 없었다면 ‘개구리 중사 케로로’ 같은 작품에서 건담을 소재로 패러디를 연출하는 상황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외에도 특히 SF 작품이 팬의 성원 속에 인기를 끈 사례는 적지 않다. 일본을 대표하는 SF 작품 ‘철완 아톰’이나 ‘철인 28호’ ‘사이보그 009’ ‘마징가Z’ 등이 몇 번이고 다시 제작돼 새로운 독자와 시청자를 만나게 되는 것은 역시 세월이 흘렀어도 이를 기억하는 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SF의 불모지라고도 할 수 있는 우리나라는 어떨까.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지만, 사실 우리나라야말로 팬들에 의해 SF가 시작되고 유지되며 발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해외 명작들을 소개한 김상훈이나 박상준 등의 번역 기획자는 모두 SF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일을 시작했다. 대놓고 ‘취미로 번역한다’고 호언하는 김상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현재는 오멜라스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책을 내고 있는 박상준 역시 수많은 SF 작품을 소장한 SF광. 그 밖에도 우리나라의 SF 업계에서는 순수하게 ‘SF가 좋아서’ 출판사를 운영하거나, 기획하거나, 또는 이벤트를 여는 이들이 적지 않다.
‘타잔’의 작가기도 한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의 ‘화성의 공주’에 이어 이번에 ‘반지 속으로’라는 이색적인 작품을 내놓은 ‘기적의 책’이라는 출판사는 바로 그런 ‘SF가 좋아서 책을 내는’ 팬의 한 가지 모습이 될 것이다.
출판사라고 하지만, 직원은 사장 1명뿐인 ‘1인 출판사’. 그것도 다른 직업을 갖고 짬짬이 틈을 내어 작품을 편집하고 사비를 털어 책을 내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2권의 책을 내고 다음 권을 준비할 정도로 정열을 갖고 움직이는 ‘팬의, 팬에 의한, 팬을 위한’ 출판사라고 할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SF 시장은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다. 새로운 책들은 꾸준히 나오지만 그중 잘 팔리는 것은 많지 않고, 계속 활동 중인 작가라고 해 봐야 손꼽을 정도. 더군다나 외국에서는 인기를 끌며 성장하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쪽의 SF는 이미 고갈된 지 오래다.
하지만 혼자서라도 작품을 내고자 하는 정열적인 팬이 있는 한 우리나라의 SF 미래는 밝으리라 생각한다.
전홍식 SF&판타지 도서관장 sflib200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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