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정 선생님의 작품 중 제일 처음 접했던 게 가고파예요. 초등학교 2학년 때쯤 봤는데, 굉장히 슬펐어요. 그 이후 계속해서 선생님 만화를 찾아보게 됐죠.”
국민 캐릭터 ‘둘리’ 아빠 김수정 화백은 박기정 화백의 ‘가고파’를 ‘지금도 다시 보고 싶은 작품’으로 꼽았다. 아기공룡 둘리 애니메이션 막바지 작업에 한창인 그와의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둘리의 애니메이션 제작과 부가사업을 담당하는 회사 둘리나라에서 이뤄졌다.
만화를 좋아하던 어린 김수정이 만화 대본소에서 우연히 접한 ‘가고파’는 탄탄한 스토리와 사실적인 캐릭터로 그를 매료시켰다. 동시에 이 작품은 그가 만화가의 길을 걷게 한 계기기도 하다.
“가고파를 보고 나서 주인공인 훈이의 그림을 굉장히 많이 그려서 지금도 그릴 수 있습니다. 그 당시 필체가 보통 덧칠하듯이 선을 긋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느낌들이 아픔처럼 다가왔습니다. 독자의 시각에서 받은 감동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변변한 놀이시설이 없던 생활 속에서 그림과 이야기가 이어지는 만화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은 그 당시 많은 아이에게 충격이었고, 유일한 오락매체였다. 그중 ‘가고파’의 인기는 ‘보고파’ 등 ‘파’ 돌림의 유사작이 연이어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김수정 화백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적이고 순정적인 내용이 그만큼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며 “그래서인지 다른 작품보다 더 기억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4편쯤부터 봤는데, 주인공 훈이가 엄마를 찾아서 헤매는 내용이었다”며 “이후 박기정 선생님의 후속작에서 탤런트처럼 등장하는 훈이의 첫 모습이 너무 슬펐다”며 생생히 회상했다.
김 화백은 처음부터 읽지 못한 ‘가고파’를 다시 보고 싶지만, 이 작품은 현재 부천만화도서관에도 없을 정도로 희귀본이다. 김수정 화백은 “대본소 만화 시절에는 작가에게 증정본을 2, 3권밖에 안 줬으니 박기정 선생님조차 안 갖고 계실 것 같다”고 짐작했다.
‘가고파’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출간된 인기작이나 수작은 대부분 제대로 보관되지 않고 있다.
김수정 화백은 “만화를 보는 사회적 인식이 안 좋았던 탓도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 당시 하도 억압이 심하니까 선생님이 평생 그린 원고를 사모님이 평생 불태운 일도 있으니까요. 만화가라는 직업에 피해의식이 상당했으니 개인이 자기 작품을 보관할 수는 있었겠지만, 사회적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죠.”
김 화백이 박기정 화백을 처음 만난 것도 만화가 데뷔 후 서슬퍼런 심의에 절망스러워하다가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잡지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나서다. 80년대 초 주간중앙에 ‘아담과 이브’란 작품을 연재했는데, 독자 반응이 좋자 당시 중앙일보에서 시사만평을 그리던 박기정 화백이 직접 그를 부른 것이다.
“하늘 같은 존재셨죠. 차 한 잔 주시면서 어깨를 두드려주셨는데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김수정 화백에게 박기정 화백은 ‘꿈’이다. 숱한 만화가 후배가 존경하는 작가로 김 화백을 꼽을 정도의 위치에 있지만 여전히 그는 박 화백이 스스럼없이 먼발치에서 부르면 좋아서 달려간다고 한다.
“일흔이 넘으신 나이지만 지금도 정정하세요. 행사나 페스티벌에 꾸준히 참여하시는 모습은 후배들에게도 귀감이죠.”
◆김수정 화백은?
명실상부한 국민 캐릭터 ‘둘리’의 원작자. 1983년 검열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 낸 둘리는 만화에서 출발, 애니메이션, 캐릭터 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쳐 원소스멀티유스(OSMU)의 시초로 꼽히기도 한다. 경남 진주에서 11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난 그는 만화가가 되고 싶어 가출을 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만화를 향한 열정이 컸다. 지금도 그 열정으로 새로운 TV시리즈 아기공룡 둘리를 제작 중이며, 캐나다와 합작도 모색하고 있다.
◆가고파는?
순정, 액션, 스포츠를 넘나들며 작품활동을 한 박기정 화백의 초기작. 1961년 당시 손꼽히는 만화출판사였던 크로바문고에서 출간됐다. 주인공인 훈이가 엄마를 찾아서 헤매는 과정에 일어나는 일들을 순정만화 형식에 담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훈이는 이후 들장미 등의 작품에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초기 우리나라 만화 대부분이 제대로 보존이 되지 않은 것처럼, 이 책 역시 원본을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수운기자 per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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