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부터 국내 통신산업은 안으로는 자유화와 민영화, 밖으로는 개방화와 국제화가 그 속도를 더해갔다. 통신기술 혁신, 통신 서비스 수요의 다양화 및 고도화, 통신산업의 개방 요구 등 국내 통신 환경을 둘러싼 일련의 변화가 숨가쁘게 펼쳐졌던 것이다. 이런 급속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 통신산업은 경쟁체제 도입을 핵심으로 하는 통신산업 구조조정을 단행함으로써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체신부는 1990년에 들어서면서 △시장경제 원리 도입으로 통신산업의 경쟁력 배양 △통신수요의 다양화 및 고도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서비스 창출 및 확대 △자율을 바탕으로 한 간접적인 조정정책으로의 전환 등 5가지 항목을 기본으로 정책 방향을 설정했다. 국내 전기통신 100년 역사상 처음으로 통신분야에 경쟁을 도입한 것이다.
◇국제전화 경쟁시대=체신부는 1990년 7월 그동안 한국통신의 독점체제에 경쟁을 도입하는 ‘통신사업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후속조치로 1991년 8월 전기통신기본법 및 공중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했다. 체신부는 한국통신이 초대형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독점에 따른 안일과 조직의 비효율성이라는 부정적 요인을 갖게 됐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한국통신이 시내전화사업의 독점을 유지하되 정보통신사업에 참여하고 한국데이타통신(현 LG데이콤)이 국제 및 장거리전화 사업에 신규 참여한다는 안을 마련했다.
1991년 12월 데이콤이 국제관문교환기 No.5 ESS 개통과 함께 국제전화사업에 진출함에 따라 바야흐로 본격적인 국제통신사업 경쟁시대가 개막됐다. 당시 가장 큰 관심사는 요금경쟁이었다. 체신부는 데이콤의 국제자동통화요금을 한국통신 요금보다 5% 싼 수준으로 확정 승인했다. 경쟁체제가 도입되면서 한국통신은 긴 통화나 몇 초간의 통화, 심야 할인통화, 기타 과금상의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하게 됐다.
데이콤은 적극적인 추진 전략으로 국내 국제통화시장의 74%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미국, 일본, 홍콩 간의 황금노선을 1단계 서비스 제공 지역으로 정했다. 또 데이콤은 전송망 확충을 위해 해저 광케이블 홍콩∼일본∼한국(H∼J∼K) 구간의 소유권 확보분 270회선 외에 한국통신에서 150회선을 추가 확보해 활용했다.
서비스 개시 1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데이콤의 국내시장 잠식률은 국제통신시장의 14%, 그중에서 미·일·홍콩은 21%를 차지했다. 이 같은 결과에정부는 경쟁체제 도입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으나 한국통신으로서는 대응 방안에 고심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시외전화 경쟁체제 도입=1993년 말 정부는 통신사업 전면 개방 및 경쟁체제를 구축 계획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구조개편 작업은 통신개발원이 정책연구과제 형식으로 구조개편의 기본골격을 마련하면서 그 실체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당시 발표된 통신사업의 구조조정 가운데 가장 관심을 불러일으킨 부문은 시외전화 경쟁체제 도입 여부였다. 통신서비스 분야의 시장개방 압력이 기본 통신시장 등 모든 통신서비스로 확산될 것으로 관측되는 상황에서 경쟁체제 도입은 필수적인 사안으로 떠올랐다.
이 무렵 한국통신은 기본 통신시장 개방에 대비한 대응전략으로 전국 균일요금을 추진해야 한다는 점을 정부에 건의했다. 당시 3단계로 이루어진 시내외 전화요금을 2단계로 축소하는 대신에 시내전화요금을 인상함으로써 시내외 통화지역 간의 요금 격차를 해소하자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기존의 요금구조는 시내전화 원가 보전율이 50%에도 못 미쳐 한국통신을 만년 적자의 늪에 빠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1994년 6월 정부는 통신분야의 국제협상이 가속화되고 각국의 시장개방과 자유화 조치도 예상보다 빨리 진전되자 데이콤을 시외전화사업의 제2사업자로 선정했다. 시외전화 부문 경쟁체제가 도입된 것을 계기로 1996년에만 30여 개에 가까운 경쟁사업자들이 새롭게 통신시장에 진출하게 됐다.
<이동전화도 경쟁 체제>
정부는 1990년 통신시장에 최초로 경쟁체제를 도입한 데 이어 1993년 말 전면 개방 정책을 추진, 이동통신 분야 경쟁 도입을 결정했다. 한국이동통신(KMT)에 이어 제2이동통신사업자를 선정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구조개편 작업은 모든 유무선 통신서비스를 포함하는 전면적인 경쟁체제의 구축이란 점에서 통신사업자는 물론 국민들에게도 관심사가 됐다. 게다가 향후 통신서비스 시장을 주도할 PCS(개인휴대통신) 등 차세대 통신인 신규서비스까지 구조조정 작업에 포함돼 있어 더욱 관심을 끌었다.
이동전화 신규사업자는 전국 단위 사업을 하는 1개 사업자를 신규 허가해 한국이동통신과 경쟁체제를 유지하도록 했다. 당시 제2이동통신사업은 4조∼5조원의 엄청난 시장으로 성장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됐다. 민간기업들은 제2이동통신에 참여할 경우 사업 다각화와 함께 미래사업인 통신시장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 큰 관심을 보였다.
대기업들은 1990년 초부터 통신시장의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물밑작업에 나섰는데 사업자 선정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과열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당초 한국통신은 소유 주식(지분 64%) 중 전기통신사업법의 규정에서 소유가 허용되지 않는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 1을 초과하는 지분을 매각하기로 했으나 정부는 한국통신 소유 지분 중 20%를 초과하는 주식을 매각하는 것으로 정책을 변경했다.
이에 따라 한국통신은 소유 주식 64% (354만 6300주) 중 44%(243만 8300주)를 매각하기로 하고 1994년 1월부터 4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공개입찰 방식으로 주식매각을 추진했다. 공개입찰로 매각되지 않은 주식 116만주에 대해서는 6월에 증권시장을 통해 매각을 완료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94년 1월 공개입찰 시 유공 등 3개 계열사를 통해 전체 주식의 23%(127만 5000주)를 인수한 선경그룹이 최대 주주로 부상해 숙원사업이던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하는 데 성공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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