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21년 전 이맘때다. 당시 국민학생(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왕쭈셴(王祖賢)이 나오는 ‘천녀유혼(A Chinese Ghost Story, 청샤오동 감독 1987)’을 볼 수 없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렵사리 구해 본 천녀유혼 불법복제판은 화면 전체에 비가 내렸지만 어린 나에게 왕쭈셴의 백옥 같은 피부의 감촉을 전달해주기는 충분했다. 그 후 나의 책받침은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에서 왕쭈셴으로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나의 영화 기행(紀行)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에게 영화 DNA를 만들어 준 것은 다름 아닌 홍콩 영화였다. 둥!∼ 둥!∼ 둥!∼ 홍콩 대표 영화사 골든하베스트의 오프닝 음악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설날과 추석을 흔들었던 홍콩 영화의 감동을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때 그 시설 홍콩 영화는 크게 두 부류였다. 쿵후 영화거나 혹은 요괴(강시) 영화거나. 쿵후 영화의 히어로가 성룡이었다면 요괴 영화의 헤로인은 지금은 신세대들에게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왕쭈셴이다.
홍콩 요괴 영화 중에서도 ‘천녀유혼’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로 불린다. 장궈룽, 왕쭈셴 등 당대 최고의 청춘 배우들이 나온 것과 함께 요괴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여러 코드가 숨겨져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나온 요괴 영화들은 모두 천녀유혼의 자장 내에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칭 21세기판 천녀유혼이라고 불리는 영화가 있다. 천자상 감독의 판타지 로맨스 ‘화피(畵皮, 전쯔단, 자오웨이 주연)’는 천녀유혼과 뿌리를 같이하는 작품이다. 둘 다 중국의 아라비안 나이트라고 불리는 괴담집 ‘요재지이’를 원작으로 했고 왕쭈셴이 자오웨이로 바뀌었다는 것이 다를 뿐 아름다운 요괴 여자와 조강지처 사이에서 고민하는 나약한 남자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화피는 판타지와 로맨스의 정점을 찍었던 천녀유혼과 마찬가지로 일반 무협 영화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하늘을 날아 다니는 수많은 와이어(wire)가 등장하지만 남성의 육체가 맞붙는 액션의 흔적은 없다. 주연 배우인 전쯔단은 지난 9월 22일 중국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나의 액션’을 보려면 다른 영화를 참조하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액션이 자리를 비운 곳엔 로맨스가 들어와 앉았다. 화피에는 인간 내면의 복합적인 감정과 세밀한 심리 묘사가 있다. 금실 좋은 부부 왕생(천쿤)과 배용(자오웨이) 사이에 요괴 소위(저우쉰)이 끼어든다. 폐허가 된 마을에서 왕생에 구출된 소위는 인간의 심장을 먹으며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요괴. 하지만 그녀는 인간인 왕 서방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첩이라도 좋으니 곁에 있게만 해달라며 간청했고 왕생도 마음이 흔들린다. 왕생의 마음을 눈치채고 힘들어하는 배용 곁에는 방용(전쯔단)이 있다. 여기에 여자 퇴마사 하빙(쑨리)이 더해지고 다른 요괴 소역(치위우)이 나타나면서 여섯 인물의 엇갈린 사랑이 시작된다.
이들 6명의 주인공이 그리는 사랑과 우정은 분명 적어도 올해 개봉된 홍콩 대작 영화보다 완성도가 뛰어나다. 사실 올해 ‘삼국지:용의 부활’ ‘적벽대전:거대한 영화의 시작’ 등 유례없는 대작이 개봉됐지만 액션에 주인공 플롯이 묻힌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화피는 달랐다. 천자상 감독은 전쯔단, 자오웨이 등 주연 배우 내면에 숨어 있는 잠재된 재능을 끌어내는 신기를 발휘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6명의 등장 인물을 그리기에 두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이 짧다는 것이다. 요괴 영화의 코드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모를까 신세대 관객에게는 더욱 그렇다. 20년 사이 업그레이드된 CG가 눈에 띄지만 천녀유혼과 같은 파격적 인상을 남기기에는 2% 부족했다는 것이 최종 판단이다.
한정훈기자 exis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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