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8) 지멘스와 교환기 국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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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기 발명으로 음성신호를 전기신호로 변환해 먼 거리까지 전송할 수 있게 됐다. 다음 과제는 어떻게 하면 여러 곳과 저렴하게 통화를 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환기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교환원이 수동으로 전화를 연결해주는 수동교환기가 처음으로 개발됐다.

 우리나라 통신산업은 1959년을 전후해서 라디오 중심의 전자산업과 그 궤를 같이한다. IT산업으로서 전자와 통신은 1970년대 후반 전자교환기(ESS)가 도입돼 전자통신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형성될 때까지 성장을 지속했다.

 1950년대 후반까지 우리나라 전화국에서 사용되던 자동교환기는 NEC 등 일본 기업들이 생산·공급하던 스트로저(strowger)식이 대부분이었다. 독일 기업의 EMD(Edelmetal Motor Drehwhler)식과 스웨덴 및 미국 기업이 생산한 크로스바식 교환기가 일부 도입되기도 했으나 비율은 극히 적었다. 스트로저식은 전화가입자의 발신 다이얼 펄스에 의해 단말기 대 단말기 스위치를 수평·수직으로 이동해 연결하는 직접제어방식으로 그 원형은 1887년 미국에서 완성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때인 1935년 경성전화국에 처음 도입된 이래 1950년대 말까지 국설용 자동교환기의 대명사로 통했다. 이 방식은 제어회로가 간단하지만 사용 능률이 낮고 접속속도가 느리며 고장발생률이 높다는 단점이 있었다.

 EMD식은 스트로저식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접점 스위치에 귀금속을 사용한 것으로 1955년 지멘스 할스케사가 독자적으로 개발해 꾸준히 발전시켜왔다. EMD식은 단방향의 회전스위치만으로 구성돼 있어 단단 스위치를 사용하는 스트로저식보다 접속속도가 빨랐다.

 스트로저식이 대부분이었던 우리나라에 EMD식 교환기가 도입된 것은 1959년 정부가 실시했던 국제 교환기 입찰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 입찰은 미국의 국제협력국(ICA)이 제공한 전쟁복구지원금 150만달러로 진행됐다. 그 규모는 이때까지 우리나라에 설치돼 있던 자동교환기 용량의 절반가량인 1만5000회선이나 됐다. 이 입찰에서 일본 측은 NEC 등 3개사가 스트로저식을, 스웨덴의 에릭슨과 미국의 ITT 등 5개사가 크로스바식을, 독일의 지멘스 할스케사가 EMD식을 각각 제안하는 등 4개국 9개사가 참여했다.

 입찰결과 회선당 88.93달러의 지멘스 EMD식이 75.16달러에 입찰한 NEC 스트로저식을 누르고 국설용 표준교환기로 선정됐다. 가격경쟁력에서 밀렸음에도 불구하고 EMD가 낙찰된 것은 이 기종이 가격 대비 성능면에서 가장 앞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표면상의 이유였을 뿐 사실은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대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는 정치적 이유가 고려됐다.

 EMD식 교환기가 표준 국설교환기로 선정됨에 따라 관련업계 이해관계가 크게 엇갈렸다. 1960년대 통신산업은 스트로저식 교환기용 부품 공급업체로 출범한 동양정밀(OPC)과 외산 전화기를 독점 공급해온 한국통신기공업 2곳이 주도해왔으나 1961년 금성사가 전화기를 발표하면서 경쟁구도는 3사 체제로 개편됐다.

 EMD식이 국설 자동교환기 시장을 장악하게 되자 당장 OPC가 된서리를 맞았다. OPC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스트로저식 교환기를 국산화하겠다는 목표로 자체 기술축적에 매진했고 마침내 1962년 NEC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100회선용 스트로저식 PABX의 독자생산에 성공했다. 이 국산 1호 PABX는 그해 10월 김포공항에 설치됐다. 1977년 ITT식 전자교환기가 도입될 때까지 우리나라 기계식 교환기 시장은 OPC의 스트로저식과 금성사의 EMD식으로 양분됐다.

 금성사는 스트로저식 교환기 국산화에 성공한 OPC에 자극을 받아 지멘스와의 직접 접촉을 통해 EMD식 교환기의 국내 생산에 나섰다. 이후 1964년 6월 금성사는 지멘스 측과 기술도입 및 350만마르크 규모의 차관도입 계약을 하고 그해 11월 국산화 25% 수준의 5000회선 규모의 교환기를 생산, 인천전화국에 납품했다.

 한국통신기공업은 앞서 제휴를 모색했던 NEC와 지멘스가 각각 OPC와 금성사를 파트너로 정하자 미국 ITT사와 손잡고 크로스저 방식 교환기 국내 생산을 시도했으나 체신부 반대에 부딪혀 자동교환기 생산을 포기하고 전화기 등의 단말기 생산에 전념하게 됐다. EMD식 교환기는 결국 이때까지 통신기기분야에서 기업 규모가 가장 컸던 한국통신기공업의 침체와 동시에 후발주자인 OPC와 금성사를 부각시킨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다.

◆인터뷰

“1960년대에는 백색전화기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지요.”

 남상훈 사이버트론 상임고문(전 체신부 자동계장)의 소회다. 그는 1959년 자유당 정부가 지멘스 EMD 방식 교환기를 국제입찰을 통해 국설용 표준교환기로 선정하고 이 교환기를 체신부 산하 용산전화국에서 처음 개통하면서 교환기와 40여년을 함께 한 인물이다.

 그는 1962년 국립 체신대학 통신공학과를 졸업하고 그해 체신부 산하 영등포전화국에서 사회 첫발을 내다디며 46년간 우리나라 통신산업 발전을 지켜봤다.

 “체신부는 지멘스 EMD 교환기를 입찰받는 조건으로 전화국 직원 7명을 독일 지멘스 본사로 DDD(장거리직통전화) 연수를 보냈지요. 그 당시에 국외 통신유학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으나 국내에 교환기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4개월간의 교육은 저에게 소중한 경험이 됐습니다.”

 지멘스의 EMD 교환기가 낙찰되면서 우리나라에 자동식 교환기 시대가 열렸지만 1965년 7월, 국산 EMD 교환기 5000회선이 설치되기까지 자동교환기를 제대로 다루는 사람이 드물었다. 당시 체신부는 전화국 직원 통신유학과 함께 지멘스와 금성통신에서 50 대 50의 지분투자만을 허용했고 지멘스는 기술을, 금성통신은 제조를 통한 합자제조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기술력을 가져오기 위한 조치였다.

 남 고문은 1974년 체신부를 떠나 금성통신 기술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교환기 수출을 주도했다.

 금성통신은 군포에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건물 내 교환기(TDX) ‘스타렉스’를 처음으로 개발했다. 이때 남 고문은 시스템연구실장으로 500여명의 연구원과 밤낮을 지새웠고 이것이 국내 전자교환기의 밑거름이 됐다.

 남 고문은 “1974년에 지멘스와 기술협력으로 개발된 EMD 교환기를 수출입은행의 지원을 받아 파키스탄·필리핀 등지에 90여대를 수출했다”며 “당시 금액으로는 최고인 600만달러어치를 수출했고, 수익도 80% 웃돌았다”고 소회했다.

 파키스탄에 공급한 교환기는 1대당 1만회선을 연결해주기 때문에 정부기관 등에 10만회선을 설치했다. 이로 인해 파키스탄 정부로부터 ‘영웅대접’을 받았다.

 “지금은 유무선 통신이 위성망을 통해 교환기와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60년대만 하더라도 교환원이 일일이 연결해 줘야 음성통화가 가능했다”며 “60년대부터 이뤄온 IT 인프라가 사회 곳곳에 널리 있는데 이를 활용할 제도적 뒷받침이 없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디지털기기와 IT인프라가 융합되면서 더 복잡해지고 더 혼란스러워졌다는 남 고문은 “원천기술이 있는 중소벤처와 자본력의 대기업이 서로 상생협력을 통한 IT강국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힘주어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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