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일제는 한반도에 수준급의 전기·통신 인프라를 남겨둔 채 물러났다. 하지만 관련시설에 근무했던 조선인은 초급 기술자나 단순 숙련공에 불과했기 때문에 일제가 물러간 뒤 이를 운영할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한국전쟁으로 남한에 있던 전기통신시설의 80%가 파괴되면서 상황은 더욱 암담해졌다. 신생 대한민국이 이 같은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원조와 지원은 실로 절대적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으로 전기통신시설 파괴=새로운 통치권력이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전기통신시설이나 방송국부터 접수해 통제권을 장악하려 한다.
해방과 함께 진주한 미 군정청도 최우선으로 총독부 산하 체신국을 접수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미 군정청은 남한의 행정공백을 우려해 체신국의 일본인 관리와 기술자들을 한동안 잔류시켜 전기통신망의 기술관리와 운영을 맡도록 했다. 덕분에 해방 후 정부수립까지 좌우대립과 무정부 상태에서 일부 행정기관의 업무는 가끔 마비됐지만 전기통신업무는 한시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
1947년 남한의 전화 가입자는 4만5000여명이지만 13년이 지난 1960년에야 겨우 9만명으로 두 배 늘었다. 증가세가 이처럼 더딘 이유는 한국전쟁 때 대구·부산을 제외한 전국의 전기통신시설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통신망의 복구는 전쟁이 끝난 1954년 미국의 막대한 원조로 본격화됐고 1957년이 돼서야 겨우 전쟁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전력 분야에서는 해방 당시 발전시설의 86%를 보유한 북한이 1948년 5월 단전조치를 취하면서 남한의 전기사정은 극악한 수준을 면치 못했다. 전기공급의 절대적 부족은 전자산업의 성장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그나마 미국의 원조로 급히 세운 화력발전소들이 가정과 공장에 최소한의 전력 수요를 충족시키는 생명줄의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은 이 땅의 전기통신산업을 철저히 파괴했지만 새로운 성장의 계기를 제공하는 양면성도 보였다. 미군이 가지고 들어온 최신 무전기·라디오·가전기기 등은 한국민이 전자기술에 처음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미제 라디오는 뛰어난 성능과 디자인으로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한국 전자산업의 태동에 큰 자극을 주었다.
◇미제 라디오의 전성시대=전쟁 중 이승만 정부의 대국민 라디오 방송은 아군에 유리한 전시상황만 발표했기 때문에 많은 국민의 불신을 샀다. 부유층은 미국·일본의 방송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고성능 라디오를 거액에 구입했다. 집 안에서 외국방송을 들려주는 라디오는 요즘으로 치면 인터넷 같은 기능을 하는 귀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선수는 미국 제니스가 만든 ‘제니스 트랜스 오셔닉(ZENITH Trans Oceanic)’이었다. 이름 그대로 대양을 가로질러 외국방송을 모두 수신할 수 있는 당대 최고의 진공관 라디오였다. 그 경이적인 감도와 음질, 중후한 디자인은 꿈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제니스 라디오를 사려면 쌀 50여가마 상당의 값을 치러야 했고 그나마 암거래로 구할 수 있었다. 이보다 저렴한 RCA, 에머슨 라디오도 없어서 못 파는 인기를 누렸다. 50년대 후반에는 미국 PX를 통해 흑백 TV수상기까지 흘러나오면서 AFKN 시청을 원하는 지식층의 애를 태우기도 했다.
미제 전자제품을 향한 높은 관심은 예전에 없던 새로운 상권을 형성했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 청계천 주변에 고물상과 미군 물품을 파는 노점상이 들어서더니 점차 라디오·전축·TV를 수리하고 거래하는 전자상가의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군용 무전기에서 나온 스위치·진공관·트랜지스터, 주먹만 한 콘덴서, 이런 저런 부품을 엮어 조립하고 고치면서 한국의 전자산업은 조금씩 태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훗날 이곳은 우리나라 전자기술의 메카로 불리게 된다. 전쟁을 거치면서 한국군은 미국의 지원으로 전기통신 분야에 숙련된 병력과 장비를 상당수 확보했고 민간 분야의 기술향상으로 이어졌다. 1961년 체신부가 개발한 최초의 국산전화기 체신 1호도 미군이 전쟁 중에 보급한 개량형 전화기가 원형이다.
◇미국 원조와 한국 전자산업의 상관관계=50년대 미국의 원조는 전쟁을 통해 피폐해진 국내 전기통신시설을 재건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그러나 한국이 초기 전자산업을 키우는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을 너무 확대해서 볼 필요는 없다. 당시 미국의 원조물자는 어디까지나 먹고 입는 소비재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주로 삼백공업(제분·제당·면방직)으로 돈을 벌었던 국내 산업자본은 기술력 부족으로 아직 라디오와 같은 전자제품의 국산화는 엄두를 못 내는 실정이었다.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실질적 시발점인 국산 라디오 개발은 순전히 ‘우리도 미제 라디오를 만들어 보자’는 구인회 락희산업 창업주의 오기와 도전으로 시작됐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50년대 후반 한국 전자산업은 마치 거인과도 같은 미국 전자산업을 목표로 삼아 한걸음씩 나서기 시작했다.
◆초창기 한국TV방송
미국의 원조는 우리나라 TV방송사의 시작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56년 5월 12일, 호출부호 HLKZ, 영상출력 100W, 채널 9로 국내 최초의 TV전파가 서울에서 송출됐다. 방송국 명칭은 KORCAD(한국 RCA배급회사). 미국 RCA사의 지원으로 설립된 최초의 TV방송국 KORCAD의 제작장비는 달랑 카메라 두 대, 가시청 지역은 서울 중심반경 20㎞였다. 그래도 아시아에서는 일본·홍콩·인도에 이어 네 번째, 세계에서는 열다섯 번째의 TV방송국을 갖게 된 쾌거였다.
개국 초에는 시내 주요 상점에 당시로서는 초대형 TV였던 RCA 21인치 수상기를 설치해 TV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유도했다. 전쟁 직후의 황폐한 한국 사회에서 TV방송국은 사실 분에 넘치는 사치였다. 개국 당시 전국의 TV수상기 보급대수는 고작 250대. 애당초 TV방송국의 상업적 광고 유치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뉴스나 프로그램 대부분을 미국에서 지원받았고 자체 방송제작은 실험적 수준에 머물렀다. 결국 운영난으로 KORCAD는 개국 1년 만에 한국일보에 인수됐고 대한방송주식회사(DBC)로 다시 새출발을 시도했지만 시련이 다가왔다. 1959년 건물 화재로 방송시설이 잿더미가 된 것이다. KORCAD는 화재 이후 AFKN의 시설을 빌려서 전파를 송출하는 등 악전고투 끝에 방송국 문을 닫았다.
당시 RCA가 TV방송이 전혀 안 어울리는 후진국 한국에 방송국 설립을 선뜻 지원한 이유는 TV수상기를 팔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미국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한국에 TV방송이 일찍 도입된 배경에는 RCA가 아니라 미정보기관 CIA가 주도적 역할을 했음이 드러났다. KORCAD에서 훈련받은 20여명의 방송요원은 몇년 뒤 국영 KBS의 핵심인력으로 흡수됐고 한국민은 TV방송을 통해 미국식 가치관과 오락프로그램에 점점 친숙해졌다.
AFKN은 1957년 이 땅에서 미군을 위한 TV방송을 처음 송출했다. 이를 계기로 미군 PX를 통해서 수천대의 TV수상기가 일반에 보급됐고 국내 TV방송이 뿌리를 내릴 산업적 토양이 생겨났다. AFKN을 통해서 쏟아진 미국의 오락물과 팝송은 전쟁에 찌든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AFKN의 문화적 영향력은 50년이 지난 오늘날도 미드 열풍으로 계속되고 있다.
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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