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당선인이 내건 경제정책의 핵심은 두말할 나위없이 ‘친기업·친시장’ 원칙이다. 이른바 ‘이노믹스’란 필요 없는 규제를 과감히 풀어 기업의 투자를 활성화하고 이를 경제 성장으로 환원시켜 ‘대한민국 747(경제성장률 7%,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강국)’을 건설하겠다는 밑그림이다. 과거와 확연히 달라질 경제환경으로 활발한 기업 인수합병(M&A)을 꼽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 당선인 측은 이미 여러 차례 M&A 환경의 걸림돌을 제거하겠다고 공언했다. 주요 재벌 기업의 몸집 불리기에 제동을 걸어왔던 출자총액제한 규제도 폐지키로 했다. 지난 IMF 구제금융이후 대규모 공적자금(법정관리·워크아웃)을 통해 상당수 기업의 지분을 보유 중인 산업은행·자산관리공사 등 국책은행의 민영화 방침도 표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영체질을 개선하고 투자매력을 갖춘 알짜배기 M&A 매물도 줄줄이 등장했다. 대한통운·쌍용건설·대우조선해양·현대종합상사·현대건설·하이닉스·대우증권·우리금융지주·대우일렉 등 이름만 들어도 굵직굵직한 기업들이다. 이래저래 M&A가 올해 이후 국내 산업계 전반의 생태계를 뒤흔들 핵심 테마인 것은 분명한 셈이다.
기업의 분위기도 종전과는 사뭇 다르다. 새 정부의 규제완화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스스로 성장을 짓눌러왔던 보수적인 태도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특검을 앞둔 삼성그룹 역시 경영방침을 ‘창조적 혁신과 도전’으로 삼고 신수종 사업 발굴과 글로벌 M&A에 역점을 두겠다고 피력했다. 지난 10년간 고속성장에 안주하며 내부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던, 그래서 M&A에 극히 인색할 수밖에 없었던 모습과는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LG그룹도 지난해 전자·화학·서비스의 3대 주력 업종에서 큰 폭의 실적 개선을 이뤄낸 것을 바탕으로 올해 M&A에 한층 공세적으로 나설 태세다. 지난해 지주회사로 전환을 시작한 뒤 글로벌화에 급피치를 올린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제3의 창업’이라는 일성으로 글로벌 M&A의 의지를 밝혔다. 가장 보수적인 롯데그룹마저 신동빈 부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서면서 글로벌 사업 확장에 적극적이다.
M&A를 통해 재계의 판도 변화를 꾀하고 있는 대기업은 물론이고, 특히 전통적인 IT 벤처 기업의 생태계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우리나라 IT산업의 풀뿌리격인 SW 업계에는 이미 M&A가 대세다. 고질적인 병폐인 출혈·과당 경쟁 환경에서 규모의 경제로써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했다. 지난해 한글과컴퓨터가 사이버패스를 인수한 데 이어 올해에도 추가 M&A에 나설 것임을 예고했고, 안철수연구소는 유니포인트의 보안사업부 인수 및 자회사인 안랩코코넛의 합병을 단행했다. 오라클·IBM·SAP·HP 등 다국적 기업이 최근 3년간 100여건이 넘는 M&A를 성사시키면서 몸집을 불려왔듯, 국내 벤처업계에도 자금력 있는 몇몇 기업들을 중심으로 M&A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M&A가 새 이슈로 부각한 데에는 과거 팽배했던 편협한 시선이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서서히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M&A 하면 경영권 분쟁만 떠올리거나, 탈법적인 우회 상장의 수단으로 활용됐던 사례, 실패했던 일과 같이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 더욱이 정권 차원의 정치적 결정도 많았다.
이명박 정부의 ‘시장주의’ 원칙이 M&A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불식시키고 산업계에 새로운 성장 도약대를 만들지 재계는 궁금해하고 있다.
◆올해 새 주인 기다리는 대어들
올해 사업성과 수익성을 갖춘 매력적인 매물들이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금융·건설·조선·물류 등 다양한 업종에 걸쳐 알짜 기업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IT도 예외가 아니다. 이미 지난해 말 하나로텔레콤과 하이마트라는 대어가 각각 SK텔레콤과 유진그룹으로 옮겨갔다.
수면으로 떠오를 곳은 하이닉스반도체와 대우일렉. 삼성전자에 이어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선두권인 하이닉스는 산업은행 등 채권 금융기관이 36%의 지분을 보유 중이다. 최근 크레디트스위스의 최종 보고서를 바탕으로 채권단은 올해 매각작업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을 11조원대로 추산하면 채권 금융기관의 지분을 인수하는 데는 4조원 안팎의 자금이 소요되는 셈이다.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감안하면 5조∼6조원대까지 예상된다. 업계는 자금력이나 업력을 고려할 때 유력한 인수주체로 LG그룹을 꼽지만 아직은 가능성으로만 거론된다. 그동안 국내 메모리 업계를 꾸준히 견제해 온 중국·대만·일본 등 외국계 자본도 배제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외국계 자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과 국부 유출에 따른 우려 탓에 국내 매각에 무게가 실릴 것으로 보인다. 하이닉스반도체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국내 재계 순위는 물론이고 전 세계 반도체 시장에 미칠 파장도 크다.
한때 가전 빅3로 명성을 날렸던 대우일렉이 어떤 주인을 찾게 될지도 주목거리다. 대우일렉 매각작업은 규모로는 하이닉스에 못 미치지만 시기는 임박했다. 우리은행·한국자산관리공사(KAMCO) 등 채권단과 매각주관사인 삼일회계법인은 지난달 10여개 국내외 기업에서 인수의향서를 제출받은 상태. 이들을 대상으로 채권단은 빠르면 이달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한 뒤 늦어도 오는 3월께는 본 계약을 한다는 방침이다. 지난 2006년 첫 매각 추진 당시 리플우드·비디오콘 컨소시엄과 벌였던 가격협상이나 현재 대우일렉의 자산가치 등을 고려할 때 5000억원 안팎에서 결론이 날 것으로 업계는 관측한다.
중·장기적으로는 방송·통신 관련 산업의 포괄적인 지각변동에 더 큰 관심이 집중된다. 이명박 정부가 IT산업 활성화를 위해 통신·방송 융합산업의 활성화를 선언한만큼 어떤 식으로든 산업 구조개편 방안이 추진될 전망이다. IPTV 합법화를 통해 통신사업자의 방송 시장 진출이 가시화된 상황에서 교차 진입 이슈를 비롯, SK텔레콤의 하나로텔레콤 인수로 촉발된 유무선 사업자 간 인수합병(M&A)은 통신·방송 시장에 M&A의 물꼬를 틀 것으로 보인다. 방송 시장에서 콘텐츠·플랫폼·네트워크 사업자의 수직적 결합과 SO의 권역을 제한하는 소유·겸영 규제도 덩달아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일단 신문방송 겸업 금지도 풀릴 예정이어서 미디어산업에선 M&A가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할 전망이다.
◆해외 선진 기업들의 M&A 사례뒤처진 국내 기업들의 관행
삼성전자는 얼마 전 비메모리 반도체인 이미지센서 사업을 위해 이스라엘 전문업체 ‘트랜스칩’을 약 300억원에 인수했다. 삼성전자가 M&A를 단행하기는 지난 1997년 3DO의 반도체 사업을 인수한 지 꼭 10년 만이다. 글로벌 기업을 자부하면서도 외부 기업과 제휴나 M&A에는 유독 인색했던 실패 전력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1994년 미국 PC 업체인 AST를 인수했다가 핵심 인력의 이탈로 공장 폐쇄라는 낭패를 봤다. 말로는 ‘글로벌’과 ‘성장’을 외치며 한 해 2조원이 넘는 돈을 주가 부양에 쏟아부으면서도 M&A에는 여전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경험이다. 삼성만이 아니다. 대다수 국내 기업은 경험 부족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탓에 글로벌 M&A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초우량 기업이 적극적인 M&A로 성장성과 수익성을 함께 만들어내는 것과 대조적이다. 지난해 10월 LG경제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글로벌 500대 기업에 진입한 회사 중 49%는 이 기간 5억달러 이상의 대형 M&A를 한 차례 이상 단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 글로벌 500대 기업 가운데에서도 성장을 위한 M&A 활용률은 58%에 달했던 반면에 최근 10년 새 500대 기업에서 퇴출된 회사의 M&A 활용률은 23%에 그쳤다. 특히 500대 기업 가운데 M&A를 단행한 회사의 연평균 매출증가율은 8.7%로 그렇지 않은 기업의 평균치인 5.6%보다 높았고 500대 기업에 신규 진입한 회사 중 M&A를 활용한 곳은 15.9%의 성장률로 월등히 컸다. 배지헌 LG경제연구원 연구원은 “국내 우량 기업은 풍부한 현금만 갖고 있을 뿐 신성장동력을 찾지 못해 성장성과 수익성이 정체되고 있다”면서 “우리처럼 보수적인 기업문화를 지녔던 일본 기업조차 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M&A를 적극적인 성장전략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는 조금 다를 것으로 전망됐다. 이명박 정부가 각종 규제를 없애면서 M&A 규제 역시 풀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삼성전자도 성장동력 발굴을 위해 M&A를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대기업의 M&A는 IPO중심의 벤처 생태계에도 변화를 몰고 올 전망이다.
해외에선 글로벌 플레이어의 M&A가 또다시 이어질 전망이다. SW 업계에선 지난해 하이페리온과 코그노스가 각각 오라클과 IMB에 인수된 데 이어 BEA시스템즈도 매물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미국 뉴스코퍼레이션이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의 모회사인 다우존스를 인수하면서 현지 미디어 산업계는 올해에도 M&A 회오리의 여파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통신시장에서는 유럽권을 중심으로 프랑스텔레콤·도이치텔레콤 등의 인수·매각 움직임이 여전히 활발하고 일본·대만의 반도체 회사도 한국 기업을 견제하기 위해 활발한 이합집산을 벌일 태세다.
서한기자@전자신문, h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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