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어느 취업전문 사이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직장인 2명 중 1명은 ‘항상 시간이 부족하고 뭐든지 빨리 해야 안심이 된다’는 이른바 ‘속도 중독증’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원인으로는 27%가 ‘과도한 업무량’을 꼽았다. ‘과다한 경쟁’(22.6%), ‘급한 성격’(21.3%) 등도 있었다. 이렇게 지나치게 일에 매달려 일 외의 것에서는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시간과 힘을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 있다. 휴일에도 출근해 일을 챙겨야 직성이 풀리며, 업무를 향한 강박관념으로 스트레스가 쌓이게 돼 기력을 상실하고 탈진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정신과에서는 이를 ‘일 중독증(workaholics)’이라고 한다.
과거 부정적인 면만 강조됐던 ‘빨리빨리’ 성향은 지금은 우리 경제발전에 큰 몫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터넷 속도는 물론이고 30분이면 치킨·피자에 각종 국·반찬이 배달된다. 오천년 ‘배달민족’으로서의 승리인 것일까.
우리말에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말이 있다. 똑똑한 뱁새는 황새가 한 걸음 걸을 때 두세 걸음 더 걸어 따라잡을 수 있고 토끼가 낮잠 자며 쉴 때 거북이는 부지런히 달려서 토끼를 이길 수 있었다. 한국인의 ‘빨리빨리’도 그런 깨달음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영어문화권 사람도 목적지를 향해 빨리빨리 서두르기는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서두름’ ‘속도’를 뜻하는 영어 ‘speed’의 어원은 ‘성공’ ‘번영’을 의미하는 고대 고지 게르만어 ‘spuot’에서 비롯됐고 그 뿌리는 ‘희망’을 뜻하는 라틴어 ‘spes’와도 닿아 있다는 것이다.
살기 어려움을 놓고 응답자의 77%가 ‘스트레스가 심하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속도를 요구하는 시대에 충실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느끼면서도 한국인의 ‘빨리빨리’는 여전히 황새 따라잡으려다 가랑이 찢어지고 거북이 하나 따라잡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하다.
남의 자식이 학원에 다니면 노래방 도우미라도 해서 자식을 학원에 보내야 하고 친구가 해외여행 다녀오면 빚을 얻어서라도 그보다 나은 여행을 다녀와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행태도 사정에 맞게 합리적으로 하지 못하는 ‘빨리빨리’ 병이 안겨준 영향임에 틀림없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간다. 그러나 나이에 따라서 시간의 속도는 다르게도 느껴진다. 그래서 젊음은 돈으로도 사기 힘든 만큼 값진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세월의 속도는 과학의 발전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진행돼 멈칫하는 사이에 경쟁자에 추월당해 버린다.
‘스피드홀릭(speedaholics)’에서 이탈하면 시대를 거부하는 것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얼마 전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도심에서 가장 넓은 장안(長安) 대로변의 건설현장을 지나쳤다. 베이징은 온통 ‘공사 중’이라고 할 만큼 곳곳마다 번듯한 빌딩이나 아파트가 줄을 이어 올라가고 있었다. 한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왕징(望京) 일대에서만 신규 분양아파트가 10곳을 넘을 정도였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세계박람회 개최를 계기로 경제 강국에 끼겠다는 심산이다. 이런 꿈을 이루려면 질 높은 인력확보와 서두르지 않고 내실을 다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개발독재 시절에서 비롯된 ‘빨리빨리’의 폐해를 이미 경험했던 바이기도 하다. 그 시절 우리가 이미 깨달은 ‘욕속부달(欲速不達)’의 정신은 중국인도 늘 되새겨야 할 교훈임에 틀림없다.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미래의 부는 시간·공간·지식이 동시에 조화를 이뤄야만 창출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미국의 기업과 금융회사는 시속 100마일, 시민단체는 90마일, 가족 형태는 60마일의 속도로 바뀌고 있는 반면에 노조는 30마일, 관료조직은 25마일, 교육시스템의 변화속도는 10마일에 그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 방한한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의 창시자인 파올로 사투르니니씨는 ‘빨리빨리’는 인간파괴 바이러스라고 강조하면서 “느리게 사는 것이야말로 ‘라 돌체 비타(La Dolce Vita, 달콤한 인생)’”라고 말한다. 당신의 삶의 속도는 얼마인가.
◆이덕근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중소기업지원본부장 dklee@kitech.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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