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용기자의 나노 돋보기](48)액체인 듯 고체!

유리는 잘 깨진다.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이온·분자들이 규칙적으로 반복·배열된 결정체(고체)들과 달리 입자 구조가 불규칙해서다. 입자와 입자 사이가 촘촘하지 않아 깨지기 쉬운 구조적 결함을 가지는 것이다.

입자들 사이가 더 헐렁해지고 불규칙해질수록 ‘액체’에 가까워진다. 비(非)결정질, 즉 입자와 입자 사이에 질서가 없는 상태(액체)다.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물을 두고 “얼마나 단단할까?”라고 묻지 않는 상식적인 이유다.

그런데 나노(10억분의 1)미터 세계에서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입자 사이가 듬성듬성 거의 액체에 가까운 상태의 금속 소재일수록 강도·내식성·내마모성이 더 뛰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석현광 박사(신금속재료연구센터)는 비결정질 소재에 대해 “결함이 너무 많아 오히려 없는 것 같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석 박사에 따르면 액체 상태에 가까운 비결정질 세라믹 코팅재가 기존 소재보다 △경도 2배 △긁힘 저항성 10배 △부식 저항성 5배 이상 우수했다.

지구 자연계에서는 ‘액체 같은 입자를 가진 고체(비결정질 소재)’를 만들 수 없다. 굳이 자연의 힘을 빌리려면 태양에 가야 한다. 태양 안에서 일어나는 핵융합반응 온도인 1만℃ 이상이 필요해서다. 석 박사는 플라스마(기체가 전기방전에 의해 전하를 띤 양이온과 전자들로 분리된 상태)를 이용해 세라믹 소재를 1000분의 1초마다 2600℃씩 가열, 1만5000℃에서 순간적으로 녹은 소재를 그대로 냉각·고착시켰다. 자연계에 없던 물질 하나(비결정질 세라믹 코팅재)를 만들어낸 것.

비결정질 세라믹 코팅재는 당장 반도체 산업에 적용할 수 있단다. 그렇게 우리 생활 밑바탕(신물질)이 조금씩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