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라는 경계는 모두 허물어지고 있는 오늘날 융복합화 시대에는 시간도, 시장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래서 글로벌 기업은 실시간기업(RTE)으로 거듭나고 있다. 정교해진 디지털 정보기술이 아무리 큰 조직이라도 세포 하나하나까지 실시간으로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해주는 덕분이다. 대기업이 공룡화돼 속도가 느리다는 속설은 이제 옛말이다. 시장 경쟁은 규모냐, 속도냐의 양자택일을 더는 허용하지 않는다. 속도를 유일한 무기로 삼고 있는 중소·벤처 기업은 갈수록 설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기업 생존과 발전의 필요충분 조건이 돼버린 규모와 속도를 동시에 갖출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은 인수합병(M&A)이다. M&A의 효과는 정보기술이 가져다 주는 속도 관리의 효과를 뛰어넘을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M&A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소 반도체 설계업체 간 합종연황 바람이 일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반도체 공장 없이 설계만을 주력으로 하는 팹리스 설계업체끼리 자발적으로 연합하거나, 아니면 생산설비를 갖춘 파운드리 업체나 판매를 담당하는 마케팅 업체가 주도해 이들을 서로 묶어내고 있다고 한다. 모처럼 시작된 반도체 설계업체 간 협력무드가 더욱 무르익어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육성중인 시스템온칩(SoC) 반도체산업에 기폭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내 반도체설계 업체는 최근 몇년간 급성장해왔지만 아직 규모면에서나 기초기술에서나 세계적인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대부분 영세한 규모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매출 1000억원을 넘어서는 곳은 손꼽을 정도다. 설계에 필요한 반도체 설계자산(IP)도 거의 다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도 반도체 설계업체가 급속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유무선 통신 인프라와 앞선 서비스 덕분이다. 세계적인 반도체 설계업체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모바일 시장이 열리면서 국내 반도체 설계업체가 천재일우와 같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도를 무기로 한 시간 차 공격은 오래가지 못한다. 인텔·퀄컴·텍사스인스트루먼츠·에이티아이 등 글로벌 기업이 모바일 시장에서 속도를 내고 있다. 모바일 시장이 결코 틈새시장에 머무를 것이 아님을, 미래 시장의 키워드임을 알아차리고 속속 진입하고 있다. 수면 아래에서는 국내업체를 인수합병하기 위한 작업도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미 상당수 업체는 자본적으로 이들과 묶여 있다.
국내 반도체 설계업체는 합종연횡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인수합병에 나서야만 하는 상황이다. 국내 벤처업계는 그동안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를 번번이 놓친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인터넷 붐과 함께 부상한 기업간(B2B) 전자상거래 솔루션에서 그랬고, 온라인 마켓플레이스에서 그러했으며, MP3플레이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후발주자인 알리바바·e베이·애플이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자리잡은 데 비해 초기에 쟁쟁했던 국내기업은 지금에 와서 초라하기 그지없다. 국내 업체가 속도에서나 기술에서나 한발 앞서 있었지만 외국 기업은 인수·합병으로 속도와 규모를 추월해 세계 시장을 장악해버렸기 때문이다.
반도체 설계업체마저 또 이런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서로 윈윈하는 열린 자세로 인수합병에 대한 생리적인 거부감을 극복하고 속도와 규모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내야 한다. 반도체 설계업체의 경쟁 상대는 고만고만한 규모의 벤처가 아니라 거대 글로벌 기업이기에 인수합병은 더욱 필요하다. 애써 키워온 시스템온칩 산업을 고스란히 외국에 넘겨주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 반도체 설계업체는 시스템온칩이 우리의 차세대 성장동력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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