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속으로 떠나는 여행]#17

 로봇 만이 아니라 조종사 마저도 슈퍼맨인 슈퍼 로봇은 열혈과 박력, 그 독특한 매력으로 일본 만화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 지배자는 1963년 TV에서 선보인 ‘철인 28호’에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바벨 2세’와 ‘삼국지’(국내에도 소개된 60권짜리 만화 삼국지)의 작가인 요코야마 미츠데루씨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2차 대전 당시 병기로 개발되던 중 종전을 맞이한 로봇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 거대한 강철의 육체 악의 로봇 군단과 펼치는 강렬한 액션 슈퍼 로봇의 시초라 부르기에 손색 없는 작품이지만, ‘철인 28호’는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데다 직접 탑승하지 않고 리모콘으로 조종한다는 점에서 지금의 슈퍼로봇과는 다른 특색을 갖고 있다.

리모콘을 사용하면 로봇이 공격당해도 조종사는 안전하다는 이점이 있지만(물론, 잘 숨어있어야 겠지만 말이다) 실수로 도둑맞기라도 하면 한 순간에 주인이 바뀌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그래서 오프닝에서도 “어떤 때는 정의의 사도. 어떤 때는 악당의 부하”라고 부르기도 했다.

결국,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자이언트 로보’에서는 조종사의 목소리를 인식해 움직이는 시스템을 도입하게 된다. 게다가 원자력을 동력으로 대포에 로켓 같은 다양한 무기를 갖춘 이 로봇은 뛰어난 인공 지능을 갖고 있어 “로보! 쳐라!”라는 한 마디만 하면 알아서 잘 싸우니 더 없이 편하기까지 하다.하지만 이래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있다. 어디까지나 로봇이 혼자 싸우고 조종사는 들러리 같은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뭐 카네다 소년이 탐정으로 활약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역시 아쉬운건 아쉬운거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마징가 Z’다. 고작(?) 20m의 키에, 25톤의 경량급에 지나지 않는 주제에 지금도 반다이의 게임, ‘슈퍼 로봇 대전’에서 막강한 주력으로 활약하고 있는 이 로봇은 나가이 고의 만화를 거쳐 1972년 TV를 통해 일본 애니의 신화를 창조했다.

초합금이라는 말과 더불어 브레스트 파이어, 헬브레스 등 셀 수 없이 많은 필살기로, 일본 애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악역 중 하나인 헬 박사를 상대로 장장 90편에 걸쳐 대결을 펼친 ‘마징가 Z’는 그 후, 보다 크고 강력한 ‘그레이트 마징가’, 그리고 외계에서 날아온 ‘그랜다이저’ 등으로 계승되어 슈퍼 로봇 역사의 시초를 화려하게 장식했다(화려한 장면으로는 ‘마징가Z’의 마지막 편을 빼놓을 수 없다).

헬 박사를 물리치고 평화가 찾아 오는가 했더니, 갑자기 미케네 제국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다이아나X부터 보스보로트, 심지어 ‘마징가Z’까지 처참하게 박살난다. 로케트 펀치가 한방에 터져 버리고 만신창이가 된 ‘마징가’의 처참한 모습은 불쌍하기 짝이 없는데, 이것이 바로 또 하나의 ‘마징가’, 바로 ‘그레이트 마징가’를 멋지게 등장시키기 위한 연출이었던 것이다.

초합금 뉴Z로 만들어진 ‘그레이트 마징가’의 아토믹 펀치는 로켓 펀치도 녹여버리고 광선을 꿰뚫고 광자력 연구소조차 처참하게 부셔버린 기계수를 간단히 날려버렸으니 말이다.이렇게 해서 슈퍼 로봇의 역사는 ‘마징가Z’에서 ‘그레이트 마징가’로, 그리고 다시 ‘UFO로보 그랜다이저’로 계승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확연히 구별되는 슈퍼 로봇의 또 다른 흐름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용자 라이딘’ 그리고 ‘마징가’로부터 시작된 열혈의 역사를 계승한 ‘게타 로보’였다.

고대 무 대륙의 유산인 ‘라이딘’과 게타 에너지를 이용해 공룡 군단과 대결하는 ‘게타로보’ 이 두 로봇은 각각 변신과 합체라는 기술로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가능성을 탄생시켰고 수많은 이들이 슈퍼 로봇에 열광하게 만들었다. 특히, 최초의 변신 로봇이었던 ‘라이딘’은 프라모델 업계에 변신 프라모델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불어왔는데, 이러한 흐름을 바탕으로 ‘대공마룡 가이킹’ 등을 거쳐, 전설적인 초전자 로봇,‘ 콤바트라V’가 탄생하게 되었다.

자동차, 비행기 등 5개의 병기가 합쳐져 하나의 로보트로 완성되는 ‘콤바트라V’. 일본 로봇 애니에서도 손꼽는 열혈 작품으로 알려진 이 작품의 특징은 역시 5개가 모여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를 연상케 하는 이 특성은 최초의 변신 로봇인 ‘라이딘’에 이어 합체 프라모델이라는 가능성을 낳았다(그래서, 연말이 되면 부모들이 머리 따로, 다리 따로 선물해서 10월부터 크리스마스를 거쳐, 2월까지 다달이 생색을 낼 수 있었다).

이렇게 초지일관 열혈로 나아가던 슈퍼 로봇의 역사. 그러나, ‘무적초인 잠보트3’, ‘무적철인 타이탄3’ 등으로 소지형 무기의 가능성을 펼쳐 보인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새로운 도전과 함께, 거대 로봇의 역사는 새롭게 출발하였다. 바로, ‘리얼 로봇(메카)’의 효시이자, 형님들의 낭만인 ‘기동전사 건담’에 의해서다.후일 토미노 감독 스스로 “로봇 애니를 할 생각은 없었다”고 말하는 이 작품은 이제까지의 슈퍼 로봇 애니와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기존의 로봇 애니는 어디까지나 정의의 로봇과 악의 로봇이 싸우는 얘기가 중심이 되었다면, ‘기동전사 건담’은 그 어느 쪽도 선이라 할 수 없는 인간, 군대의 대결(다시 말해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로봇끼리의 전투가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로봇의 비중이 약해졌다(진정한 의미에서 로봇이 나오는 우주 전쟁 이야기라 할까?).

우주전함이 등장하고, 전투기가 날아다니며 전차포가 난무하는 가운데 전장을 질주하는 모빌슈츠와 인간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만큼 현실적인 분위기를 갖게 된 작품들은 이제껏 아이들의 전유물이었던 로봇 애니에 청소년, 그리고 성인층의 눈길을 끌어들이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열혈 중심의 슈퍼 로봇이 쇠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건담’을 시작으로 ‘마크로스’, ‘보톰즈’, ‘엘가임’, ‘가리안’ 등 리얼로봇이 쏟아져 나오는 사이 슈퍼 로봇은 아이들 밖엔 보지 않는 ‘용자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철인28호’에서 시작된 슈퍼 로봇의 전통은 그 후 ‘에반게리온’ 등에 영향을 주었고, ‘용자왕 가오가이거’를 거쳐 다시금 눈길을 끌게 되었다. 한때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졌던 슈퍼 로봇. 그러나, 일본 애니 역사에 필적하는 깊은 전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겉으로는 슈퍼 로봇이지만, 실제로는 샐러리맨 조종사들이 활동하는, 초 현실적인 로봇 애니 ‘지구방위기업 다이가드’ 같은 퓨전 작품의 등장도 실현되고 있는 건, 역시 40년이 넘는 역사의 힘이 아닐까?(이것이야 말로, ‘태권 V’를 시작으로 30년 역사의 우리나라에서 본받아야 할 점이다).SF 칼럼리스트. 게임아카데미에서 SF 소재론을 강의 중이며, 띵 소프트에서 스토리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스페이스 판타지(http:www.joysf.com)란 팬 페이지로 유명하다.

<그림설명>

- 고전 만화붐과 더불어 ‘철인28호’도 새롭게 탄생했다.

- 이것이 진정한 슈퍼 로봇의 기원? 자이언트 로보 애니메이션은 로봇 만화 중 최고의 박력을 자랑한다. - 불멸의 악당 헬박사. 다소 바보 같지만 마지막까지 저주를 퍼붓는 열혈 악당이다.

- ‘마징가 Z’의 처참한 최후… 그러나, 이것은 바로 ‘그레이트 마징가’를 위한 연출이었다.

- 슈퍼 로봇 역사상 가장 미려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용자 라이딘’. 이 상태에서 새 모양으로 변신도 할 수 있다.

- 로봇 애니메이션 사상 손꼽는 열혈의 소유자. ‘게타로보’ 마지막엔 적진에 자폭 공격을 하는 장렬한 연출을 보여주기도 했다.

- ‘콤바트라 V’ 디자인은 묘하지만, 상당히 박력있는 작품이다.

- ‘무적초인 잠보트 3’ 총기를 드는 이 로봇이 바로 그 유명한 ‘건담’으로 계승된다.

- 리얼로봇의 효시. ‘기동전사 건담’. 이로서 로봇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새롭게 쓰여지게 된다.

- ‘마크로스’에 이르면 이미 슈퍼 로봇은 자취도 존재하지 않는다.

- ‘용자왕 가오가이거’. 드디어 슈퍼 로봇은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 ‘다이가드’ 겉보기엔 슈퍼로봇이지만, 하늘을 나는 건 고사하고 무기도 없어서 주먹을 뽑아서 “로켓펀치!”라고 외치며 던지는 장면은 끔찍한 현실미를 보여준다.

<전홍식기자 pyodogi@sfwa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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