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각 부처가 그간 요란스럽게 쏟아내온 70여 개의 과학기술 관련 중장기 계획들이 내용과 형식 면에서 서로 연계되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일한 목표를 가진 중장기 계획임에도 불구하고 부처마다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부처 입맛에 맞게 주먹구구식으로 계획을 수립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만큼 목표 달성 가능성에 의구심을 가지게 되고, 과학기술 관련 중장기 계획의 신뢰성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우리는 ‘과학기술 입국’을 국가 어젠다로 내걸 만큼 국가적으로 과학기술 육성에 관심을 쏟고 있다. 우리가 살 길은 과학기술밖에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경쟁에서 패퇴하고는 나라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각 부처가 실효성이 의심되는 계획들을 경쟁적으로 내놓는 등 생색내기에만 바쁜 것으로 비쳐져 정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 과학기술 분야의 정책근간이라 할 수 있는 ‘과학기술기본계획’은 있으나마나한 계획처럼 여겨질 정도니 한심스럽다. 과학기술기본계획에 제조업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율 목표나 국가 물류비용 절감목표가 정확히 명시돼 있으나 산업자원부의 ‘산업기술혁신 5개년 계획’과 건설교통부의 ‘건설기술혁신 5개년 계획’에는 이것과 다르게 제시돼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목표 연도가 다를 경우 달성 목표에도 분명 차이가 나는 게 옳다. 하지만 부처가 마련한 중장기 계획이 기본계획보다 달성 계획 연도가 늦은데도 목표치가 낮은 것은 둘 중 하나가 잘못됐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각 부처가 기존 ‘과학기술기본계획’ 자체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R&D분야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부합하지 않는 계획도 많고, 심지어 같은 부처가 마련한 중장기 계획들 간에도 내용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인력 양성, 민간기술 지원, 지역혁신 관련 계획이라고 다른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이니만큼 과학기술 정책들이 중복될 수밖에 없고 제대로 실행될 리 만무하다.
이처럼 부처가 내놓는 중장기 계획이 제각각인 것은 중장기 국가연구개발사업 관련 계획의 경우 법적으로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심의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무시하고 부처 독자적으로 수립한 탓이 크다. 이로 인해 부처별 중장기 계획도 중복이 심하고 예산낭비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비전 제시와 함께 이를 달성하기 위한 중장기 실행계획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정책 주체들 간의 다른 목표는 결과적으로 정책혼선을 가져온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부처이기주의에 우선해 세운 것이라면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한 예가 많다. 그만큼 관계부처가 유기적 교류를 통해 이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론 과학기술 정책 조율기능을 맡고 있는 과학기술혁신본부가 이달부터 현재 마련된 부처별 과학기술 관련 중장기 계획을 주요 정책·기술분야별로 중복·사장·휴면·상충 현황을 파악해 전반적으로 조정할 계획이라니 다행이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 정책의 실행력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도 국가 과학기술 정책의 근간이 되는 과학기술기본계획을 현실에 맞게 보완·수정, 중장기 방향과 비전을 명확히 제시하고, 각 부처가 이에 준거해 세부 실행계획을 수립하도록 시스템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일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R&D 예산 간 연계 강화를 위한 작업도 필수적이다. 과학기술부총리를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정책 결정과정의 시스템을 재정립할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정책조율 기능을 강화해 정책혼선을 최소화해야만 과학기술 정책에 실효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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