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각본상, 편집상을 받은 폴 해기스 감독의 데뷔작 ‘크래쉬’는 아카데미에 비판적인 사람들조차도 그 결정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만큼 뛰어난 영화적 완성도를 갖고 있다.
크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각본을 쓴 폴 헤기스 감독이 믿기지 않는 제작비, 불과 650만달러의 저예산으로 완성한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 발표와 함께 인종차별에 대한 영화라고 알려졌지만, 단순히 인종차별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LA에 살고 있는 여덟 커플의 자질구레한 일상이 씨줄 날줄로 종횡무진 펼쳐지면서 조금씩 톱니바퀴가 맞물려 들어가는 뛰어난 각본이나,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개해 나가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속도감 있게 각 파트의 에피소드들을 연결하는 연출, 그리
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는 ‘크래쉬’만의 감동을 만들어냈다.
모든 행동에는 원인이 있다.‘크래쉬’는 일방적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혐오도 비난도 하지 않는다. 시상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방송국 흑인 프로듀서의 부인은 달리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오럴섹스를 한다. 순찰중인 경찰 라이언(맷 딜런 분)은 불심검문하면서 부인 크리스틴(탠디 뉴튼 분)의 몸을 구석구석 쓰다듬는다. 성추행이다.
그러나 남편 카메론(테렌스 하워드 분)은 더 큰 불상사를 막기 위해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한다. 라이언의 파트너인 핸슨(라이언 필립 분)은 상사에게 파트너 교체를 요구한다.
폴 해기스 감독은 일방적으로 라이언을 비난하지 않는다. 라이언은 혼자서는 거동도 힘든 병든 아버지 수발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는 가정 내의 스트레스를 밖에서 해소하지만, 감독은 애정 어린 눈으로 라이언의 피폐한 삶을 들여다본다.
결정적으로 그는 교통사고로 폭발 직전의 전복된 차량 안에서 남편과 싸우고 돌아가던 크리스틴을 구조한다.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상층부에 속하는 인물인 LA 지방검사 릭(브랜든 프레이저 분)과 그의 아내 진(산드라 블록 분)은 흑인 청년에게 차를 강탈당한다. 정치적 성공에 관심이 집중된 릭 때문에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진은 흑인 가정부에게, 그리고 열쇠 고치러 온 멕시칸 남자 대니얼에게 화풀이를 한다.
이란에서 이민 온 파라드는 자신의 전 재산인 가게를 지키기 위해 열쇠 수리공 대니얼을 부르지만, 문을 고쳐야 한다는 대니얼의 충고를 무시한다. 그리고 가게는 강탈당한다. 더구나 대니얼의 경고를 무시했다는 게 드러나면서 보험 보상도 되지 않는다.
파라드는 그 모든 원인이 대니얼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대니얼의 어린 딸을 향해 총을 겨눈다. 또 지방검사 릭의 차를 강탈한 흑인 청년 피터와 앤쏘니는 우여곡절 끝에 집을 향해 돌아간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은 한 지점에서 거대한 충돌로 만나게 된다.
불교의 연기설을 떠올리게 할만큼 모든 인물들의 행동에는 원인이 있고 그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영향을 미치며 서로 연결될 수 없을 것 같은 다양한 인종,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은 어느 순간, 한 지점에서 충돌하게 된다.
911 이후, 미국 사회가 앓고 있는 자기 성찰의 증후군의 한 단면을 이 영화는 보여 준다. 왜 그들은 비행기를 쌍동이 빌딩에 충돌시키며 자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 다른 시민의 목숨을,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만 했을까? 이런 질문이 결국 이 작품을 낳았다.
오늘의 미국 사회는 결코 911 이전으로 완벽하게 돌아갈 수 없다. 이미 상처는 벌어졌고 문제는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스럽지만 상처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이 작품은 그 노력의 한 결과물이다.
<영화 평론가 · 인하대 겸임교수 s2jazz@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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