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호 창간특집기획]한국 온라인게임에 영향을 준 거장들

우리나라는 현재 온라인게임 강국으로 세계적으로 인정 받고 있다. 그렇다고 이 많은 작품들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진 것은 아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개발자들의 밤샘과 고통이 수반됐기 때문에 이뤄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국내 개발자들에게 영감과 아이디어를 불어 넣어 준 세계적인 거장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산 온라인게임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대체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가. 또 온라인게임 제작에 어떤 영향을 줬는가.

알렘 애드햄과 마크 모아헴, 프랭크 스피어스는 블리자드의 창업자이자 핵심 개발자다. 현재 대표 이사와 부사장을 맡고 있으며 개발도 함께 참여하고 있다. 블리자드 개발자들은 외부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얼굴 마담으로 빌 로퍼를 내세웠던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핵심 개발자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이들이 처음 창업했을 때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재정 압박이 심해 직원들의 급료를 지불하기 위해 신용 카드를 이용했을 정도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워크래프트’가 성공하면서 부터다.이들이 국내 온라인게임에 준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바로 ‘스타크래프트’과 ‘디아블로’ 때문이다. ‘스타크래프트’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전략시뮬레이션게임이다.

이 작품이 없었다면 PC방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설사 만들어져도 지금처럼 붐을 일으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스타크래프트’가 전국의 PC방을 만들었고 이 기반으로 ‘리니지’ 등 MMORPG가 자리잡을 수 있었다. 정부의 인프라 구축 정책보다 게임 하나의 영향이 더 컸던 셈이다. 그리고 프로게이머와 e스포츠가 탄생했고 게임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게임 케이블 방송까지 만들었다.

‘디아블로’는 한술 더 뜬다. 이 게임은 원래 콘도르라는 회사에서 기획됐으나 블리자드로 인수된 후 게임이 대폭 변경됐기 때문에 블리자드에서 개발한 것으로 인정하는게 옳다. ‘디아블로’는 패키지 게임이었지만 오늘날 한국형 온라인게임의 기반을 제공한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배틀넷을 통해 멀티플레이가 가능했는데 이것이 바로 온라인게임의 아이디어가 집약된 시스템이었다. 배틀넷은 현재의 ‘게임 로비’ 역할로 유저들은 여기서 다른 유저와 채팅을 하고 정보를 교환하거나 팀원을 모집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매우 획기적인 아이디어였고 ‘스타크래프트’도 이 시스템을 도입했다.

또 ‘디아블로’는 턴제의 롤플레잉 장르를 실시간 전투로 변경시켜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것으로 바꿔 놓았다. 여기에 아이템 산정 방식을 서버당 몇 개로 만들어 희소성을 유지시켰다. 최초의 아이템 현금 거래도 ‘디아블로’ 아이템이었다. 국내 최고의 온라인게임 ‘리니지’가 ‘디아블로’의 여러 가지 면과 매우 유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디아블로’가 없었으면 ‘리니지’도 없었다.

프랭크 스피어스는 자신들의 성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 번째로 유저가 만드는 게임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는 게임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작품을 만든다. 그래서 자신들이 직접 플레이 할 때 재미있는 게임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다. 두 번째 이유는 게임이 재미있기 때문에 유저들이 깊이 매료된다는 점이고, 마지막으로 기술보다 게임 플레이에 집중해서 개발하기 때문이다. ‘스타크래프트’가 처음 출시됐을 때 사람들은 왜 3D로 개발하지 않고 2D로 방향을 잡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그것은 우리가 기술에 집착하지 않고 뛰어난 게임 플레이에 전력투구하기 때문이다.”현재 국내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매번 온라인게임 순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스페셜 포스’. 공식적으로 동시접속자수가 항상 10만명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인기작이다. 이 게임도 갑자기 땅속에서 솟아 난 것이 아니다. 누군가 FPS(일인칭 액션 게임)라는 장르를 만들었고 기반을 다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존 카맥이 처음 일인칭 액션 게임 ‘울펜슈타인 3D’를 만들었을 때 전세계 개발자들은 깜짝 놀랐다. 2D 기반의 그래픽이었지만 실제 사람의 눈으로 보는 듯한 시점을 구현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가장 효율성이 떨어지는 도스 언어로 만들었기 때문에 동시대의 프로그래머들은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울펜슈타인 3D’는 최초의 FPS였으며 이후 그는 ‘둠’ ‘퀘이크’ 등을 만들어 진정한 의미의 3D 그래픽과 FPS를 완성했다. 또 게임 소스를 공개해 누구나 자신의 엔진을 기반으로 FPS를 만들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정보는 공유돼야 한다는 해커 정신에 입각해서였다. 존 카멕이 없었다면 ‘엑스틸’ ‘헉슬리’ ‘서든 어택’ 등은 존재할 수 없는 작품들이다.

존 카맥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천재였다. 중학교 시절 ‘울티마’를 처음 플레이하고 큰 충격을 받아 게임을 만들기로 결심한 그는 애플 컴퓨터에만 매달렸다. 오로지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익혔고 고등학교에 올라서자 아르바이트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해 2년만에 자퇴해 버렸다.

존 카맥은 피자 가게 점원으로 일하며 프로그래밍 아르바이트만 계속했다. 그러다 존 로메오를 만나 의기투합해 id소프트를 설립했고 여기서 전설이 시작됐다. 그가 만든 작품들은 하나같이 시대를 앞서가는 기술이었고 수많은 아류작을 양산시켰다. 또 ‘둠’에는 인터넷 멀티플레이를 지원하도록 만들어 유저들이 서로 상대방을 찾아 사살하는 방식을 선보는데 바로 배틀넷의 초기 아이디어였다.

실제 미국에서 존 카맥을 만나 봤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게임 기술은 무한히 발전됩니다. 현실같은 그래픽도 곧 구현될 것입니다. 제가 만든 게임들은 그 시작을 알린 것 뿐입니다. FPS는 단순히 게임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방면으로 활용되면서 그 진가가 발휘될 것입니다.”리차드 게리엇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게임 개발자 가운데 정상의 사나이다. PC게임을 개발한 인물이라면 누구도 그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며 그 어떤 작품도 리차드 게리엇의 이름 밑에 있다.

그는 어린 시절 팬터지 소설 ‘반지의 제왕’을 읽고 환상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또 이를 토대로 만든 주사위 보드 게임 ‘던전 앤 드래곤스’에 몰두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로 진학해 애플컴퓨터를 처음 보곤 곧바로 자신의 할일이 컴퓨터 게임을 만드는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리차드는 교장선생님에게 컴퓨터 프로그래밍 과목을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당시에는 프로그래밍 조차 생소했고 담당할 선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거절됐지만 리차드는 독학이라도 하겠다며 떼를 썼다. 결국 학교의 허락을 얻어 그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컴퓨터 언어를 홀로 익혔다.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후 컴퓨터 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다 틈틈히 만들었던 ‘아카레베스’를 별 생각없이 유통업자에게 넘겼는데 막대한 판매가 이뤄지면서 돈방석에 앉았다. 엄청난 성공을 거둔 리차드 게리엇은 본격적으로 개발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1982년 오리진 시스템을 설립해 드디어 ‘울티마’를 공개했다. 그리고 9탄까지 매번 시리즈를 선보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울티마 온라인’이다. 당시만해도 온라인게임 개념 조차 극히 희박했을 때였고 MMORPG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이 게임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MMORPG의 대중화를 선도했다.

‘울티마 온라인’은 MMORPG의 잠재능력을 모두 구현했다. 극한의 자유도와 전투, 마법과 환상의 세계, 커뮤니티 등을 고스란히 온라인게임으로 옮긴 불멸의 명작이다. 이 작품을 모르고 MMORPG를 개발하는 것은 마치 지도도 없이 무작정 세계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최근 국내 온라인게임 시장은 캐주얼게임과 MMORPG가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몇년 전에는 온라인게임의 주인을 MMORPG로 인정하고 있었으나 ‘카트라이더’가 급부상하면서 이러한 공식은 깨졌다.

이 작품은 쉽고 간단한 조작과 재미있는 플레이로 남녀노소 누구나 즐겼다. 흔히 ‘카트라이더’는 ‘마리오 카트’와 유사하다는 논란이 있는데 ‘마리오 카트’는 미야모토 시게루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단순히 국내 인기 게임과 유사한 작품을 먼저 만들었다는 것에 불과할까. 그건 그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그는 일본 게임 산업을 일으킨 주인공이며 수많은 히트작으로 게임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북미에서는 콘솔게임과 닌텐도를 거의 동일한 단어로 사용하는데 미야모토 시게루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슈퍼 마리오’ 시리즈와 ‘젤다의 전설’로 게임이란 무엇이며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했고 지금까지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게임은 재미가 있어야 하고 그 재미란 어디서 솟아 나는지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바로 미야모토 시게루다. 온라인 캐주얼게임으로 승부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이 사람의 작품을 플레이하는게 순서다.MMORPG는 RPG 즉 롤플레잉에 기반을 두고 있다. 국내 게임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인 이원술 사장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나 김학규 사장의 ‘악튜러스’ ‘라그나로크’ 등은 모두 일본식 롤플레잉이 기반이다.

또 국내의 많은 개발자와 유저들은 북미의 롤플레잉보다 일본식 롤플레잉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시작은 사카구치 히로노부에 의해서 비롯됐다. 이 사람은 그 유명한 ‘파이날 판타지’를 만든 인물이다. 이 작품은 스토리에 중심을 둔 게임으로 가치가 높다.

 눈물나도록 감동적인 드라마틱한 이야기와 실감나는 그래픽, 심금을 울리는 사운드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최고 수준의 동영상을 플레이를 사이사이에 집어 넣었다. 그래서 그가 만든 작품은 한편의 장편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여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 소프트맥스의 최연규 실장이다. ‘창세기전’ 시리즈로 국내 롤플레잉의 대중화를 선도한 그도 ‘파이날 판타지’를 벗어나긴 힘들다.

사카구치 히로노부의 ‘파이날 판타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마지막으로 만든 게임이었다. 그래서 제목에 ‘파이날’이 붙어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시리즈가 출시될 때마다 판매 신기록을 작성했고 PS2의 대중화에도 큰 몫을 담당했다.

그가 창조한 롤플레잉의 새로운 면모는 고스란히 국내 MMORPG들과 연결돼 있다. 특히 최근 온라인게임들의 추세가 탄탄한 시나리오와 화려한 그래픽, 웅장한 사운드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남긴 업적을 짐작할 수 있다.

<김성진기자 har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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